改革主義(칼빈주의) 五個條 敎理

(Five Points of Calvinism)

趙聖模 牧師

 

 본문: 로마서8:29-34

개혁주의(改革主義)의 기본교리(基本敎理)는 우선 칼빈주의(Calvinism)를 의미한다. 칼빈주의자를 개혁주의자 (Reformed People)이라고 한다. 칼빈주의란 개신교(改新敎,Protestant) 중에서도 특히 개혁주의 신앙의 체계를 말한다. 개혁주의의 기본교리는 우선 한 마디로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이란 무엇인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영원불변(永遠不變)하시며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주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 현재일이나 장래에 있을 사건들을 절대적(絶對的)으로 친히 간섭(干涉)하시는 것이다. (대상29:11-12) 칼빈주의자 미터 박사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인 행사(行事)*라고 하였다. (127:1; 7:13)

그러면 개혁주의 다섯 가지(五個條) 교리를 요약하여 보고자 한다.

 

1. 인간의 전적 타락 (人間全的 墮落, Total Inability)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 (基督敎綱要)제 21장에서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온 인류가 저주를 받았고 원시(原始) 상태에서 부패하였다고 강조한다.

1) 아담의 타락의 역사가 보여주는 죄()의 본질(本質)

 

아담에게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그의 순종을 시험하며 그가 과연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는 한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고 또한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實果)를 먹으면 즉시 죽으리라는 끔찍한 경고(警告)를 주셨다.

이것이 아담의 믿음을 입증하고 실행하게 한 것이었다. 기독교의 초기 교부(敎父) ,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말하기를 *교만(驕慢)이 모든 악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자세가 다 흔들리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도 온전히 남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신앙이 타락의 뿌리였던 것이다. 즉 흙으로 지음 받은 자가 하나님의 형상(形象)대로 지음 받은 것도 모자라서 하나님과 동등(同等)하게 되기를 탐하였으니 이 얼마나 몹쓸 악행인가!

 

아담의 반역(反逆)은 그저 단순한 배반(背反)이 아니었고 거기에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비열한 모욕이 결합되어 있었다. 이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거짓과 시기와 악의가 있다고 떠드는 사탄(Satan)의 비방에 그대로 동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신앙으로 인하여 야망(野望)이 생겨났다. 이 야망이 완악한 불순종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敬畏)를 내동댕이치고 정욕(情慾)이 이끄는 대로 아무렇게나 자기 자신을 던져버린 것이다.

 

2) 죄의 오염(汚染)

 

아담이 그 지으신 분과 연합(聯合)하여 있고 또한 그에게 매여 있는 것이 그의 영적 (靈的)생명이었던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곧 그의 영혼의 죽음이었다. 그가 하늘과 땅의 자연 질서(自然秩序) 전체를 부패시켰으니 자신의 반역으로 자기의 모든 후손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바울은 말씀하기를 *피조물이 다 ...탄식하며*(8:22) 썩어짐에 굴복하는 것이 자기의 뜻이 아니라(8:20)고 한다.

 

이렇게 된 원인을 찾자면 피조물들은 사람이 사용하도록 창조되었으므로 사람이 받을 형벌의 일부를 피조물들이 마땅히 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온 세상에 퍼져나간 그 저주가 아담의 죄책(罪責)에서 흘러나온 것이므로 그 저주가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로 퍼져나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후손들이 물려받은 부패성인데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교부들은 표현하였다.

 

3) 원죄(原罪)의 본질과 정의

원죄는 본성의 부패이며 창조된 본성의 모습이 아니다.

원죄란 영혼의 모든 부분들에 퍼져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만들고 또한 성경이 말씀하는*육체의 일*(5:19)을 우리 속에 일으키는바 우리 본성의 유전적(遺傳的) 타락성과 부패성이라 정의할 수 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자주 죄라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거기서 나오는 것들- 음행,(淫行) 더러운 것, 호색,(好色) 우상 숭배(偶像崇拜), 주술(呪術), 원수 맺는 것, 분쟁(分爭), 시기(猜忌), 분 냄, 당 짓는 것, 분열(分裂)함과 이단(異端) (5:19-21)을 가리켜 *죄의 열매*라고 부른다. 성경은 이것들을 *죄들*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두 가지를 분명히 기억하여야 한다. 참고구절(21:27-32)

 

4). 죄는 전인(全人)을 부패시킨다.

아담이 의()의 근원을 저버린 후에 죄가 그 영혼(靈魂)의 모든 부분들을 지배한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부패(腐敗)가 한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전체부분을 더럽힌 것이다. 참조(3:1-20) 바울은 육신의 모든 생각이 다 하나님과 원수가 됨으로(8:7) 육신의 생각이 곧 사망인 것이다. (8:6)이라고 증언한다.

 

2. 무조건적 선택 (無條件的 選択, Unconditional Election)

요한, 칼빈은 영원한 선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또 어떤 이들은 멸망(滅亡)에 이르도록 예정하였다고 강조한다. 즉 만일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이 값없이 베풀어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에 들어갈 길이 막히는 일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秘密)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선택 받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우리 주변에 어떤 죄인과 악인들이 있을지라도 누가 예수 믿고 구원받을지는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야한다. 그러나 알미니안 주의(Arminianism)는 존 칼빈(John, Calvin) 의 예정교리(豫定敎理)를 반대한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알미니안(Arminian)은 화란 신학자이다. (Jacobus, Arminius. 1560-1609) 알미니안 주의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라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 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화란국의 자유교회와 영국의 성공회(聖公會), 미국과 기타 산재(散在)한 감리교회(監理敎會)와 침례교회(浸禮敎會), 성결교회(聖潔敎會), 오순절교회 (五殉節敎會) 등이다.

 

1) 이 영원한 선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의 선택 (78:67-68, 147:20)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분깃* 혹은 *하나님이 소유*라고 불렀다.(32:9; 왕상8:51; 28:9, 33:12)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언약(言約)에서 제외되었다.

 

(2) 개개인의 선택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구원을 베푸실 뿐 아니라 그 효력(效力)이 미결 상태에 있다거나 의심스럽지 않도록 확실하게 구원을 보장(保障)하신다.

(6:37;9:7-8;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삭개오를 부르시고 구원을 주신 것도 조건 없는 선택이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19:5,9)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부르시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고전1:26) 그것은 복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믿음의 반응을 가져온다. 참고구절(1:6; 살전2:14)

 

인간이 구원받는 존재로 선택되어지는 것은 어떤 조건이나 노력과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알미니안 주의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선행을 보시고 선택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위험한 소리인가? 이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다. 그러면 선택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정(予定)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정에는 두 부분으로 나눈다.

 

선택(選擇)과 버리심 즉, 유기(遺棄)이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일부분의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였다는 뜻이다. , 택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들이다. (1:4; 3:12; 살전1:4; 살후2:13 참조) 선택받은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날에는 환난의 날을 면하게 하시고(24:22) 사방에서 모아주신다.(24:31)

 

그렇다면 버리심은 무엇인가? 버리심이란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뜻에 의하여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고 지나가심을 의미한다.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9:13-15, 17-18, 21-22, 11:7 )

 

3. 제한적 속죄 (制限的 贖罪, Limited Atonement)

타락(墮落)한 인류 전체가 아담 안에서 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요한 칼빈(J,Calvin)은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 26장에서 *십자가의 도()가 우리의 인간적인 성향에는 맞지 않지만 우리의 주인이시오 지으신 분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멀어진 상태에 있던 그분에게로 다시 돌아가 그가 다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상태를 회복하기를 바란다면 그 도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속죄(贖罪)의 범위인 것이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나누어 보자

 

질문1)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질문2) 아니면 택하심을 받은 사람만을 위하여 죽으셨는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어떻게 보내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속하시려고 세상에 오실 때에 오직 택함 받은 사람들만을 구원하러 오셨는가? 아니면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오셨는가?

 

이것에 대한 문제가 초점(焦點)이다. 개혁주의 입장을 먼저 밝히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택함 받은 자들만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고 그 택함 받은 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 받는 사실을 주장한다. 이것을 제한적 속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로마서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위하여*라는 말은 원문에 *대신하여*라는 뜻이다. 스펄전(C, H. Spurgeon) 목사는 말하기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고 생각이요 그의 모든 계획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봉이 십자가*라고 하였다.

 

1) 제한적 속죄의 성경적 근거(制限的 贖罪聖經的 根據)

하나님께서 만민을 구원할 계획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면 만민이 다 구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만민이 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된다면 그 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만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계획하셨던 대로 택함 받은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4:39, 10:26-29;2:41,47, 4:4, 9:40-42, 11:24, 16:5, 28:23-25,28)

참고적으로 요한복음 17장은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제한적인데 그의 속죄의 범위도 제한적인 것이다. 다음 성경구절들은 제한적 속죄를 뒷받침 한다.

(1) *그의 양* (10:11,15) 염소가 아니다. 우리 주님은 양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지 염소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2) *그의 교회* (20:28, 5:25-27)

(3) *그의 백성* (1:21)을 위하여 구원하신다고 증언한다.

 

요한 칼빈은 *하늘의 유업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5:9-10)라고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독생자(獨生子)의 몸에 접붙임을 받지 않은 자들이 자녀의 지위를 지닌다고 보는 것은 전혀 합당치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필수적인 것이다.

 

요한은 분명히 선언한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우리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엄밀하게 말해서 믿음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성부(聖父)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제한적 속죄 혹은 *특별한 구속(救贖)*이라고 한다. 즉 제한적 구원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을 하나님의 은혜대로 무조건 선택 받은 자에게만 제한되어 유효하다는 의미이다.

(1:3-14)

 

이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제한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능력이 있고 무한한 가치가 있다. 요한복음176절에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마가복음214절에도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레위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신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부정(否定)하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들이 현실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제한된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 것을 볼 때에 속죄도 제한된 증거이다.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절대주권으로 구원을 얻을 자와 못 얻을 자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 , 선택받지 못한 자 혹은 장래에 멸망할 자 인줄 아시면서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속죄하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무리들, 그의 양() 창세전(創世前)에 선택한 백성들만을 위하여 구원하신 것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 (不可抗力的 恩惠, Irresistible Grace)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와야 한다. (6:37-40) 성령께서는 저항 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어 선택받은 자를 구원하신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저항 할 수 없는 구원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전폭적인 하나님의 절대적인 행사(行事)인 것이다. (9:6, 16:14) 만약에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죄의 포로(捕虜)로 남아있다면 이것은 십자가의 도()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뿐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유효적(有效的)은혜를 의미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01절에는 이렇게 말한다. 1절에 보면 *하 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에로 인도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문답(小 要理問答) 31문에는 효력(效力) 있는 부르심에 대하여 말하기를 *효력 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이니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고 또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권하사 능히 복음 중에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구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 구원에 이를 자를 하나님은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이 부르심은 구원에 이르도록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것을 의미한다. 스펄전 목사는 말하기를 *불신자들이 독실(篤實)해지며 부도덕(不道德)한 사람들이 순결(純潔)해지며 부정직(不正直)한 사람들이 정직해지며 경건(敬虔)하지 못한 사람들이 은혜로워지며 부정한 사람들이 거룩해진다.

악한 태도가 갑자기 그치고 회개한 사람들이 덕을 행하려고 몸부림을 친다. 자기만족에 빠졌던 사람들이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겸손하여진다. 자신의 타락(墮落)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행복을 찾는다. 그리고 비록 멸망당한다 해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딤전1:15)

 

그 이유는 십자가의 도()가 우리를 사단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더러는 믿고 더러는 믿지 아니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主権)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과 뜻을 따라서 그 원하시는 사람들을 정()하신 수()대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거듭남, , 중생(重生)의 은혜는 유효적(有效的)으로 부르시는 은혜와 아울러 불가항력적이다.

 

바울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擇定)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15)라고 증언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은혜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부르시고(8:28) 의롭다 하시고(8:30) 영화롭게 하신다.(8:30)

요한 칼빈은 말하기를 *아무 사람도 자기를 그리스도의 양으로 만들 수 없다. 그리스도의 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주권은 실패할 수 없고 반드시 성취되어지는 것이다.

 

5. 궁극적 구원 (窮極的 救援, Perseverance of the Saints)

 

궁극적 구원을 성도의 견인(聖徒堅忍)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7:25)

1) 궁극적 구원의 특징은 무엇인가?

 

(1)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1:12; 2:4)

(2) 아무도 택한 백성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가 없다. (8:38-39; 3:6; 13:8)

(3) 구원을 빼앗을 자가 없다. (10:28, 18:9)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신비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1:14)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중생하고 회개하며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고 성화(聖化)의 생활을 하던 성도(聖徒)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의 날에 부활(復活)하여 영화롭게 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일을 궁극적 구원, 즉 영화(榮華)라고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7장은 이렇게 서술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받아들이고 효과있게 부르시고 또한 성령(聖靈)으로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있을 것이며 또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 (1:6; 벧후1:10, 요일3:9)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그 성령을 통하여 행하시는 중생(重生)의 체험을 가진 자라야 그리스도의 속죄를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선행(善行)이나 공로(功勞)는 도저히 자신의 구원을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주의 즉, 개혁주의 신학은 명백히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중생(重生)하게 하신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범죄(犯罪)하고 타락하는 길에 있을지라도 은혜의 길에서 완전히 떨어 질수가 없는 것이다. 마침내 다 돌아와 구원에 이르게 된다.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죄로 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한일서54절에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그렇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로서 난 것, 곧 새 생명은 이김의 원리이며 언제라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은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백성을 빼앗을 자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붙드시는 사람은 끝까지 보존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인(堅忍)의 은혜의 확실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기인(基因)한 것이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원동력이 되지 못한다. 협동할 수 있는 힘까지도 성령께서 주셔야 가능한 것이다.

요한 칼빈(J, Calvin)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의 품속에 들어오게 하신 자들을 보존 하신다*고 하였다. 유다서24절에 보면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라고 증언한다. 여기서 능히 보호하신다는 말씀은 *능히 타락으로부터 보호하실 자 영원토록 영광 받으실 자*를 의미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 받은 백성들을 능히 보호하시며 영화롭게 하신다. 그리고 *흠이 없다*는 선언을 받게 된다. 즉 하나님의 법은 우리를 더 이상 정죄(定罪)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를 흠이 없게 서게 하도록* 하신 주님의 의로움으로 덧입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도마도 의심(疑心)이 많았다. (20:25-29)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26:70-75) 이런 사실은 선택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일시적으로 연약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20:28)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상태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떨어질 수 없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자기 백성을 붙잡으시며 강한 손으로 보호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빈손을 펼치자 빈 마음을 주께 드리자! 이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으로 우리를 받으실 것이다.

 

이것보다 더 귀한 사명이 어디에 있는가? , 우리의 최대 사명인 것이다. 또한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이요 개혁주의의 가장 기초 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인 결정을 믿고 구원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고 감격하여 전도하며 살아가자 !

 

모든 수고는 내가 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존 칼빈(John, Calv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