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강의 : 김 세윤 敎授 (總神大 神大院 敎授)

 

 

일반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는 미시적인 방법과 거시적인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성서유니온에서 사역하고 있는 성경묵상은 성경을 자세히 보는 미시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만으로 공부한다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 된다. 이런 약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가끔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한 눈에 살펴보는 기회가 필요하다. 이러한 방법이 거시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은 상호보완적이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하지만 가끔씩 전문가(신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A. 문제제기

 

1) 복음서 : 예수님의 가르침

 

마가는 마가복음 1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고 나서 예수가 선포한 복음을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아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마가복음 1: 14 - 15을 보면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公生涯를 하나님 나라 선포로 시작했다.

 

1 : 15 "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2) 서신서 : 바울(사도)의 가르침

 

그런데 서신서중 고린도전서 15 : 1 - 5을 찾아보면은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나와 있다. 특히 3절 후반부에서 5절 전반까지 4개의 小節(영어에서의 that)福音說明하고 있는데 이를 要略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復活”, 그리스도의 十字架 가 된다.

 

예수님이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다.

우리는 하나의 문제점에서 출발하는데 그 문제는 이러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예수의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고전 151- 5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다. 고전 151절에서 3절 중반까지가 서문이고 3절 후반부부터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요약되어 있다. 내가 전한 복음을 꼭 알아야 하겠다고 하면서 그 복음은 바울이 이미 선포했던 복음이고 고린도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서 이미 구원을 얻은 복음이다. 그런데 바울이 걱정이 되었다. 과연 처음 받은 복음위에 견고히 서 있는지 자기가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복음은 자신도 먼저 사도들로부터 받아서 고린도인들에게 전했다. 받고 전했다는 말은 유대 랍비들이 가르침을 선생으로부터 받아서 전승해 주는 전문용어이다. 그 내용은 모두 네 개의 로 구성되어 있다.

고전 15 : 3 - 5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초대교회부터 랍비들의 가르침의 전형이다. 받은 것을 그대로 전수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핵심)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추가설명)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핵심)

5절 이후 (부활증거)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500여 형제, 야고보,

바울에게 보이심 (추가설명)

그렇다면 1) 죽으심(十字架)意味2) 부활의 意味는 무엇인가 ?

 

그 다음에 5절 전반부에 베드로에게 보여졌다는 것 이 네 文章이 우리말 성경에는 절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 성경과 영어 성경에는 절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다가 바울은 부활을 부인하는 고린도인들에게 부활의 眞理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난 씨리즈를 이야기하고 있다.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고, 그 중에 일부는 죽고 태반이나 지금까지 살아 있고, 야고보(주님의 동생)에게 나타나고, 모든 使徒들에게 나타나고 마지막에 滿朔되지 못한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 지금 이 부분들은 바울이 다 덧붙이는 것이다. 앞의 네개의 절들의 내용이 복음이다. 고린도전서 1511절을 보자

 

고전 15:11 “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바울)나 저희(다른 사도들)나 다함께 이 복음을 선포하고 세계의 모든 교회가 이 복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도 이 복음을 믿는다고 한다. 이 복음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과 그가 사흘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이 두 문장 중심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있는 문장들은 앞서가는 문장의 사실을 부가적 기능을 한다. 거기 성경대로라는 문장이 붙어 있다. 그리스도가 성경대로(according to scripture) 죽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것이 우리 죄를 해결하고 종말에 나타난 메시야 구원자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는데,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은 書信書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를 읽다가 서신서를 읽으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직접적으로는 거의 안 나온다. 나오더라도 가끔 나온다. 그 대신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선포의 중심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초두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자기 복음을 십자가의 라고 한다. 그것이 복음이고 자기는 그것만 선포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도들의 메시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일까 ? 이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 일부 自由主義 神學者들은 이 차이점에 대하여 예수님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 사도들의 메시지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에 근거하고 있다. 사도들의 서신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을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있다. 미리 結論부터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인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사도들의 메시지는 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는가에 메시지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구속사건을 통하여(근거)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축복(결과)이 주어진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어떻게 제자(사도)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했는가 ? 하나님 나라 선포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네 가지 전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구약에서의 전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B. 4 가지 전제들

 

1. 創造思想() - 창세기 1:1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나온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하나님만이 主人이시고 이시다. 본래 히브리어에는 추상명사가 발달되지 않아서 우주(Cosmos)를 지칭하는 말을 그냥 하늘과 땅(天地)이라는 말로 썼다. 천지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지만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시고 땅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이 거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1:26,27)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육체나 영혼등 어느 일부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아니 사람의 외모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이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대신 다스리는 副王(Vice-king)으로 세우신 것이다.

 

2, 타락 -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으로 땅에서 통치를 대신하게 하신다. 그러나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에 대해 대항하게 하여 인간은 사단의 종이 되고 사단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스스로는 피조물로서 제한성(결핍성)을 지니는데 이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고통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증상이다. 로마서 6:23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이란 단어는 로마시대 용병들에게 주는 품삵(월급)을 뜻한다. 즉 사단이 우리를 부려먹어 죄를 짓게 하고 그 삯으로 죽음을 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며 타락사상이다.

나무의 예를 들어보겠다. 만약 나무가 그 생명의 근원인 땅으로부터 뽑힘을 당했다면 그 나무는 죽은 것일까 ? 산 것일까 ? 물론 산 것이다. 왜냐하면 일정한 기간 물이나 양분의 공급이 없더라도 나무안에 비축된 물과 양분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그 나무는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물,양분의 계속적인 공급이 없으면 결국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성에서 분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있다고 일컫어 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공급이 없어지면 인간은 결국 죽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었다고 한다. 란 바로 하나님의 主人되심을 否認하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존재하려는 것이다.

人間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분의 보호와 모든 능력과 자원을 제공받으며 살도록 지음 받았는데, 오히려 인간은 사탄의 꾀임을 받아서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존재하려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려는 것이 바로 本質이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무한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內的인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인간 스스로 자기能力智慧를 개발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맞게 된 결핍이나 고난을 해결해 나갈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人本主義 운동이다. 그 결과는 해결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대로 풍성함이 아니라 오히려 결핍이다. 즉 부족함이다. 이 결핍을 극복하려고 인간은 무한한 자기의 능력과 지혜를 스스로 개발하여 왔다. 그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안된다. 결핍을 극복하려고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여 科學이나 文明을 발달시켜 왔으나 그 결과는 인간에게 더 큰 죽음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인간성의 황폐화로 인하여 이웃사이의 관계가 삭막해지고 인심이 각박해졌다. 과학이 발달해서 더 살기 좋은 樂園을 이룬 것 같았지만 반대로 더 많은 어려움과 공해를 불러 일으켜 왔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모습이 이러한 것이다.

11, 12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운동 즉 문예부흥운동은 로마-그리스시대의 찬란했던 문명을 복구하려한 운동인데, 이 운동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는 대표적인 人本主義 운동이다. 인간은 결핍을 극복해보려고 지혜를 발휘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지경에 빠지고 더 큰 타락을 가져왔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탕자가 아버지의 집(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떠난 결과가 무엇인가 ? 그것은 인간성의 황폐와 결핍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탕자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회복과 부요함이 그에게 주어졌다. 아버지께서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 잔치는 바로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에게 풍성한 자원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만 부요함(풍요)이 있다는 것이다.

 

3. 救援 - 세번째로 言約思想이 있다. 언약은 곧 선택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다시 한번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음이다. 언약이란 타락한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원래 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존재하려고 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행복하고 혼자 부요함을 누리면서 잘 살 줄을 알았는데 그 결과는 반대였다. 빈곤함과 결핍이었다. 인간이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그 결핍을 보충하려고 투쟁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여 내 욕심을 채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결핍은 그러한 방법으로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언약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다시 너희들의 왕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타락전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는 이 말이 바로 언약의 핵심문구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친히 너희의 하나님 즉 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과 관계를 맺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方法이 바로 인간과 언약을 맺는 것이다.

4. 終末思想 - 마지막으로 종말 사상이 구약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하셔서 종말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先知者들을 통하여 예고하셨다. 그러므로 그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과 다시 한번 올바로 연결되어서 즉 탕자가 죽음의 상태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상속자로 회복이 되어서 아버지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고 아버지의 부요한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나무로 말하면 타락한 인간이 다시 한번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뿌리박아 무한한 부요함을 덧입어서 사는 삶을 永生이라고 한다. 영생이란 영원한 삶이란 말이 아니고 오는 세상의 삶이란 말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기 때문에 영원한 삶이라고도 하지만 죽음이 완전히 극복된 고난이 없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적인 삶이다. 하나님의 全知하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全能하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참여하는 삶이므로 고난이 없고, 결핍이 없는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같이 됨 그것이 긍극적인 의미로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같이 됨이 인간 스스로 내재의 가능성 속에서 찾는 아담에 게 있었던 것같은 인본주의의 그 환상에 인간이 늘 젖어 있다. 인간이 만물의 근원인 것 같고 인간의 내재의 자원, 지혜를 개발하고 하면 인간이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음으로 가게 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속에서 살면 하나님 나라에 살면 하나님의 부요함을 덧입어서 하나님 같이 된다. 神的인 삶이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고 종말에 약속된 구원이다.

 

C. 하나님 나라의 전파는 바로 舊約에서 약속한 그 구원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네 가지 구약적 전제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인간이 죄와 죽음이 왕노릇하는 사단의 통치아래 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들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 구원이 임박했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것일까 ?

그것이 바로 막 1:15의 내용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임박했다고 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 구약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박했음을 우리에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이란 말은 틀린 말이다)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하고 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또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는 미래에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유대 묵시문학가들같이 땅의 물질적인 유비를 써 가지고 현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거부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며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말하면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며 구원을 받는 것이며 바로 이런 원칙적인 신학언어를 주로 쓰셨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인 통치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도 하나님은 마땅히 으로 로 군림하셔야 하나, 이 땅에서는 그의 왕권을 찬탈한 사단과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들에 의해 그의 왕권이 무시되고 그의 이 거스려지고 있다. 고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땅위에 사단의 세력을 꺾고 그의 통치를 세워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 그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도록 열망하고 빌라고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주로 역동적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왕으로서의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2) 하나님 나라를 비유(PARABLES)로 가르치셨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는데, 여러 비유 중에서 잔치비유를 즐겨서 가르치셨다. 구원을 큰 잔치로 비유한데서 온 것이다. 잔치 중에서도 특별히 혼인잔치 비유로 가르치셨다(2:1 - 11 참조). 잔치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는 바로 잔치의 상징성 때문이다. 잔치에는 결핍의 상대어인 풍요와 배부름이 있다. 즉 만족함이 있다. 기쁨과 사랑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에 참예하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부요함이 있다. 인간의 결핍이 해결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반면에 사탄의 나라의 특징은 와 죽음이다. 그래서 사탄의 나라를 죄와 죽음의 나라라고 한다. 사탄의 나라는 결핍성, 욕구불만 슬픔/아픔, 생존경쟁/갈등 투성이다. 부족하기에 서로 더 가지려고 아귀다툼하면서 살아간다. 생존경쟁에 빠져있다. 제한성에 갇혀 있는 것이 사탄의 나라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무한함에서 제외되어 유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주장하고 또한 이웃에 대하여 자기주장하니까 착취와 경쟁이 사탄의 나라의 특징을 이룬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고, 다른 사람을 내 으로 만들어 지배하려고 한다. 그래서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즉 인간은 서로에 대하여 늑대이다. 자존심의 대결이다. 인간 사회는 욕심의 대결장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 즉 혼인잔치의 비유로 설명하시는데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풍성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는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1)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아울러 2) 상속(기업)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속의 그림은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데 특별히 눅 12 : 30에 보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상속) 주기를 기뻐하신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는 부요함과 상속의 개념이 같이 들어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죽음, 고난, 결핍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무한함에 참예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풍성함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는 유대 랍비의 묵시문학이나 회교의 경전인 코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D.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점

 

1.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임박할 실재의 나라이다.

 

2. 아울러 하나님 나라는 현재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고 가르쳤다. 여기에 예수의 강조점이 있다.

 

11: 14 - 23

 

11:14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 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11: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1: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11:17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1: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1: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1: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11: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11:23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는 것과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예수의 반대자들이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조롱하였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너희 아들들도) 귀신을 내어쫓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아들들은 (너희자신) 누구를 힘입어서 귀신을 내어쫓는냐고 반문하셨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원래 유대인의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적대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이다. 예수님은 바알세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능력)으로 즉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거기 이미 임했음을 증거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탄의 나라(귀신의 나라)에 속한 자를 해방시켜서 하나님 나라로 이동시키셨다. 믿음으로 이동시켰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귀신의 힘을 극복하고 구원하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실현된 것이다. 귀신이 쫓겨감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됨을 의미한다. 벌써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을 말로 약속하셨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 이적을 동반한 것은 (귀신을 내어쫓고,병자 고치심)하나님 나라의 실현(시위 :Demonstration)이다. 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치유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너무 표면적인 해석만 하여 이 치유를 단지 육신의 병고를 고치는 것으로만 이해하게 될 때 잘못된 구원론, 성령론과 맞물려서 신앙의 미신화를 초래하게 되며 성령을 마력적인 존재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또 이와 반대해서 구원을 단지 來世오는 世上의 것으로 이해하면 신앙이 관념화 ,추상화되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치유를 포괄적으로 실존의 전 영역에서의 치유로 이해해야 한다. 고난 가운데 있는자가 하나님 나라의 새생명에 동참한 것이다.

치유의 사역은 죽음의 증상(질병,고난,지혜 없음,우울증,외로움 등)들을 극복하여 온전케 함이다. 감기 걸리면 재채기, 콧물, 목아픔, 등의 감기의 증상이 나타나듯이, 죽음도 증상이 있다. 지혜 없음, 가을이 되면 우울함,,피곤함 이러한 것들은 바로 죽음이 드러나는 증상들이다. 치유는 단순한 병고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치유의 사역이다. 불치의 병인 암을 고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못된 독재자(김정일, 전두환)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여 그가 변화되어 새 삶을 살고 바른 정치를 한다면 이 보다 더 큰 구원이 어디 있겠는가 ?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치유의 사역이 아니고 무엇인가 ? 병 고치는 것과 복음을 전하여 그를 삭개오처럼 변화시키는 일 어떤 일이 더 큰 일인가 ?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사역이 전인적인 온전한 치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구원 즉 치유하여 온전케 하셨다. 삭개오는 주님을 통해서 치유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또한 이웃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되었다. 뒤틀려진 관계가 바르게 되었다. 육신의 병만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이다. 빈곤과 정치적 압박도 고난이다. 구원(치유)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되는 것이다. 모든 참된 것과 선, 아름다움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모든 악, , 썩어짐은 사탄으로부터 온다.

 

안식일

 

예수님은 그 당시 전례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셨다. 안식일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다 마치셔서 더 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그 심히 좋은 창조를 즐기며 쉰 날이다(2:1 - 3). 그러나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는 타락하여, 그것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고 사단의 주권아래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식하지 않고 그의 창조를 고치는 일 ,곧 구원의 사업을 하시는 것이다(5:17-21).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은 원래의 의미로 안식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극적인 증명이다. 이에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병자를 치유함은 병든 창조를 고쳐 하나님의 심히 좋은창조로 종말론적으로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대로의 안식일이 있도록 한다는 사실의 상징적 또는 극적인 증명이다.

즉 예수의 안식일에의 치유활동은 사단의 통치아래 병든 하나님의 좋았던창조를 사단의 통치 밑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다스림 밑으로 가져와 치유하고 원래의 좋았던상태로 회복하여 진정한 안식일이 있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극적인 천명이었다. 안식일은 결핍에서의 회복과 관계 있다. 하나님께서는 6일간 天地創造를 완성하시고 일곱째날 安息하셨다. 창조를 完成하시고 안식하셨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자기 스스로 일함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즉 자기의 지혜와 선행을 개발해 나갔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종교라고 만들어낸 것은 모두 지혜와 선행과 관계가 있다. 모든 종교는 지혜와 선행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려고 한다. 즉 자력구원을 표방하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지혜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교(자각), 힌두교, 마니교, 플라톤 철학을 비롯한 헬라의 종교(영지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을 통한 구원의 길을 표방하고 있다. 힌두교의 경전인 리그베다에서 베다라는 뜻은 헬라어 οιδα (오이다 --- 알다,)와 같은 의미이다. 타락한 인간은 지혜를 극대화하여서 이것이 교육과 연결되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지혜를 개발한 노력이 역사를 살펴보면 계속되어 왔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농업혁명)으로 인하여 소비재를 비롯하여 많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고, 농업혁명으로 풍요한 양식을 가져왔으며, 의학, 통신, 교통이 발달하였다. 이와 아울러 죽음도 더 크게 확대되었다. 통신의 발달로 우리의 삶이 노출되고 있다. 개인의 정보가 노출되고 있다. 교통의 발달은 대형 사고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건축및 토목공학의 발달로 큰 다리를 건설했으나 더 큰 재해를 가져왔다(성수대교 붕괴). 농기계(경운기, 트렉터)의 발달로 인하여 농민들이 기계화되어 편리한 면도 있지만 기계를 잘못 다루면 목숨을 잃거나 더 큰 재난을 당한다. 소비자 사회는 물질주의에 빠졌고 인간성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발달은 해결이 아니라 더 큰 죽음을 가져왔다.(성수대교 사건, 택시강도, 지존파 등) 과학발달및 지혜가 개발되면 될수록 죽음은 더욱 더 극대화되고 공해, 인간성 황폐, 억압과 감시가 더 심하다.

 

이와 반대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자연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회피운동 같은 것이다. 그래도 그 안에 참만족이 없고 결핍이 있다. 죽음이 있다.

안식은 바로 재창조의 축복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통한 안식일과 관계되어 있다. 안식일은 종말의 때에 주어지는 영원한 안식에 대한 그림자이다. 십계명중 제 4 계명은 창조의 완성에 대한 안식의 기념이다. 동시에 종말에 있을 안식일을 고대한다.

 

안식의 반대인 일을 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 인류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풍요의 상징인 에덴에서 추방 당하자. 자신의 삶을 위해 일해야 했다. 땅을 일구어 나가면서 그들은 문명을 이룩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문명낙관론이 환영받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형태나 공산주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피조물은 피조물의 제한성(결핍성)으로 인해 스스로 삶을 확보할 수 없다. 인간의 일함을 통해서 인간은 어느 정도 삶을 확보하지만 이 삶은 항상 죽음을 동반한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이 이를 뒷받침 한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삶과 자유는 확대되었다. 이와 아울러 죽음의 속박도 확대되었다.

 

안식일 지킴

 

안식일은 하나님의 하나님(주인,)되심을 고백하는 날이다.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생명의 근원이 있고 풍성함이 있음을 고백하는 날이다. 6일 동안 일하는 것은 자력구원을 의미한다. 올바른 질서가 아니다. 죽음을 가져온다. 구약성경에 보면 안식일을 안 지키면 죽는다. 하나님의 풍성함에 참예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과 행복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의 일을 삼가야 된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치유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결핍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안식일에 손 마른자를 치유하셨는데 손이 말랐다는 것은 결핍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풍요에서 떨어져 나감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다. 이러한 고난은 바로 죽음의 증상들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일로부터 쉬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엿새 동안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살겠습니다라는 다짐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6일 동안 돈을 받고 의술을 행하였다고 주일에 아무런 의술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생업으로서의 의술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울러 주일은 우리의 신앙을 말씀으로 북돋우는 날이 되어야겠다. 교인끼리 만나서 교제하고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지켜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잔치와 상속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가는 과정이다. 예수님이 치유를 안식일에 하셨는데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한 것을 암시한다.치유를 주로 안식일에 하심으로해서 하나님 나라가 창조를 다시 한번 심히 아름다운 상태로 만들어 우리 모두가 생명의 풍성한 상태로 가게 한다는 것이다.

 

E.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

 

예수의 언어 사용에 있어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과 더불어 온다는 동사를 많이 사용한다.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또 수동형으로 주어진다”.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받다등의 언어를 사용한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확장한다라는 말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아주 독특한 언어이다. 유대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 ?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확장하는 내재의 현실이 아니다. 초월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즐겨 쓰는 용어인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거나 확장한다는 표현은 일체 쓰지 아니한다.

이러한 예수가 즐겨쓴 말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 가지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1) 초월성과 (2) 은혜성이다.

초월성이란 하나님이 초월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초월자가 아니라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자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은혜성이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주권을 확립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권의 영역에 들어와 그 주권의 복(생명)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초월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기에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초월성과 은혜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가지 초월성과 은혜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를 볼 때 자유주의는 문명 낙관론을 주장하였다. 신학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대로 실천하며 살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신학으로 정치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천지개벽처럼 갑자기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열심당(열혈당)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정의와 자유체제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메시야 즉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메시야가 나타나서 다윗의 왕국을 지상에 다시 재건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로마로 부터 자기들을 해방하여 새로운 다윗 왕국을 지상에 재건할 것을 꿈꾸어 왔다. 그들은 혁명으로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예수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은혜성과 초월성이다. 하나님이 초월해 계셔야만 우리에게 구원이 일어난다. 내재의 것은 제한성(결핍성)이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제한된 자원을 다 동원한다해도 극복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가져온다. 그러므로 제한성 밖에서 무한하신 이로부터 구원이 우리에게 올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초월해서 은혜로 주어진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초월성과 은혜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온다”, “들어간다”, “받는다라는 언어를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초월해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물론 2 차적인 의미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확장한다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성과 초월성을 망각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중요한 비유들을 사용하셨다. 열혈당원들이 생각했던 식으로 전쟁이나 혁명을 통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유대 묵시문학가들처럼 천지개벽으로 온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마 13장에 나오는 비유의 성격들을 이해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몇 가지 성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누룩과 겨자씨 비유는 쌍둥이 비유이다. 예수님은 종종 쌍둥이 비유를 가지고 말씀 하셨다. 진주와 밭에 감추인 보화비유,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비유등이다. 이것은 또한 여자와 남자의 하는 일로 양분하고 있다. 겨자씨 비유는 천국의 외형적인 확장을 의미한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일년생 관목으로 가지가 많은 식물로 자라간다. 그 가지 속에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이게 된다. 여기서 많은 새는 랍비문학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많은 민족을 가리킨다. 그래서 긍극적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안식처를 제공해서 많은 새들이 깃들 것을 또는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죽음의 요소들을 극복하고 생명으로 부풀린다는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확장시켜 나가시는데 우리의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누룩비유는 여인이 가루 서말에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한다. 이 비유는 여인과 관계 있는 비유이다. 누룩은 보이지 않지만 결국 가루를 부풀게 하듯이 이 비유는 천국의 내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지만 천국은 자라간다.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신다. 이 비유는 천국의 은닉성을 암시한다. 누룩은 가루속까지 파고 들어가 부풀어 올린다. 아울러 필연적으로 자라간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운동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1) 은닉성 (2) 점진성 (3) 필연성이 있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미미하게 시작되었다. 거대한 로마제국내에서 갈릴리에서 나사렛 출신 예수가 어부 몇 명과 여인 몇 명으로 시작한 아주 미미한 운동이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무시해도 좋을 만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 오늘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지 않는가 ?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 (모든 민족을 의미한다)이 깃들일 정도로 자라난다. 온 세상이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을 부여 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을 통해서 온다.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오는가 ? 억압이 아니라 말씀으로 설득해서 온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예수님은 弟子道를 사랑의 두 계명으로 요약하고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2.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계명으로 구약의 모든 계명을 요약했다.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삶의 법칙으로 주었다. 사단이 인간을 꿰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지게 하고 자기주장하게 하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게하여 착취의 원칙으로 나타나고 그럼으로 갈등과 고난을 낳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반대는 우상숭배이다. 자기주장이다. 자기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철저하게 경계하신 것이 맘모니즘이다. 돈에 대한 우상숭배는 돈으로부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되니까 우상숭배는 곧 착취의 삶을 요구한다. 그것은 갈등과 고난을 낳아 죽음의 길로 이끈다. 오늘날 우상숭배란 돌이나 나무조각에 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가장 심각한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맘몬 즉 돈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딤전6:10).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도 하나님의 부요함을 깨닫기 전에는 돈이 인간의 행복과 안전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결핍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돈을 착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부요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길이며 죽음의 길이다. 삭개오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몰라서 착취하였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부요함을 깨닫고(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샬롬이 임한 것이다. ) 다른 사람의 것을 착취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하였다. 이웃을 압제하는 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삭개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구원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으로부터도 소외 당하였다. 그래서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혼자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은 돈을 숭배하는 자이었다. 삭개오와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였다.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했을 때 오히려 근심하며 돌아갔다. 착취하여 많이 소유하면 행복이 보장될 것 같으나 오히려 고난이나 갈등이 더 커질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면 하나님의 샬롬 즉 고통대신에 자유와 평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삭개오는 하나님을 선택함에 따라 샬롬이 확대되고 불의 대신에 정의가 확대되어 간다. 그것이 하나님 통치에 있어서의 삶이 그만큼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가 점차 확대되어간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함에 따라 즉 두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이루어진다. 첫 계명은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우상숭배하면 착취를 낳고 갈등을 낳고 죽음을 확대시킨다. 그것이 바로 사단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거기에는 샬롬이 확대되고 그러니까 초월해서 온 은혜로운 통치의 힘이 우리를 성령으로 설득해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하면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확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점진적으로 아주 가시적으로 더 많은 생명의 풍성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지금 하나님 나라가 왔다.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나라 법에 따라 성령의 설득으로 우리가 진짜 우상숭배를 버리고 타락의 세상에서 살려고 하는 중에 시시각각의 가치판단과 윤리판단에서 사랑을 베풀도록 시시각각으로 나를 주장할 것인가 ?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 판단하는 상황에서 사단의 말을 들으면 이웃과 나와 함께 고난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땅에 샬롬이 확대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살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확장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도의 덕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누누히 강조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오른뺨을 치면은 왼뺨까지 돌려대고 맞는 것이다. 그것이 이웃사랑이고 이웃에 대한 헌신이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반대는 우상숭배로 나타난다. 그래서 바울은 롬 1장 후반부에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싫어하면 결국은 우상숭배로 빠지게 되어 있다. 중간지대는 없다. 하나님의 대용품을 만들어 섬긴다. 우상숭배는 자기주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은 부요가 아니라 오히려 결핍을 가져온다. 그래서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하여 스스로 자원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자기가 열심히 돈벌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니까 죽도록 일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부족한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럴수록 죽음은 더욱 더 확대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타나는 양상이 바로 마약, 폭력, 변태적 성욕, 지존파, 르완다, 소말리아 사태 등이다.

 

인간의 타락 때부터 사탄의 나라가 지배하고 있다. 이 나라가 계속되는 동안에 예수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출범되었고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사탄의 나라는 끝이 날 것이고 이와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것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시험 때 이미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선전포고를 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탄의 등뼈를 부러뜨렸다. 그러나 그 사탄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고 완전한 제거는 주님께서 재림할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시 110편에서는 예수님께서 사탄을 완전히 정복할 것에 대하여 네 원수(사탄)로 네 발등상 될 때까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탄을 완전히 짖밟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사탄의 잔재세력은 다 없어지고 박살날 것이다.

 

 

 

오는 세대 (,생명이 지배) 성령을 따라 살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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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각축장 완성된 하나님 나라

(긴장의 관계) 새 하늘과 새 땅

초림 부활(등뼈 뿌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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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 (,죽음이 지배) 육신을 따라 살아감 재림

 

 

F. 聖殿完成者 -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 보면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종종 가족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그림언어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왕 -- 백성, 아빠 -- 자녀(상속자), 목자 -- 양떼, 농부 -- 포도원 또한 언약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노릇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가정언어로서 하나님을 아빠’(ABBA)라고 부르고 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3계명). 그래서 하나님 이라는 말 대신에 전능하신 이, 창세로부터 계신 이, 세세무궁토록 계시는 분 등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 당시 아빠라는 말은 금방 말을 배운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으면서 매우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었다. 아빠라는 말은 친근하면서도 매우 의존적인 말이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집을 비유로 들어서 많이 말씀하셨다. 문 즉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또한 열쇠라는 말을 쓰셨다.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셨다. 문으로 들어가 열쇠를 따고 들어가면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식탁이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의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집의 가장(host)으로서 우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신다. 성전 안에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푸신다.

詩篇중에서 시14, 24편 등을 성전순례시라고 한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시편 24 편과 이사야서에 나오는 것인데, 성전의 순례시에서 성전에 들어간다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가 그 순례시의 말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의 言語를 사용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어린 아이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자이다.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여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의로워야 하며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것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제자란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자, 의로운 자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언어들을 살펴보면은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그렸다. 예수의 예루살렘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 ? 예수는 그 당시 종교와 생활의 중심지인 성전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리고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그대신 자기가 성전을 짓는다고 했다. 왜 예수께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가 ? 성전을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했기에 성전에서 데모를 했는데 성전을 청결케 해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선지자적 언어로 말하면 드라마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 제사 지내고 하는 것이 이제는 쓸데 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사 드릴 제물을 사고 파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체포되어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 받으신 것이다. 네가 정말 성전을 짓는다고 했느냐 ?라고 하니까 예수께서 묵묵부답이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다시 묻는다. 그러면 성전 문제와 하나님의 아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 쿰란문서를 보니까 이 용어가 삼하 7 : 1 - 13절과 관련되어 있다.

 

삼하 71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삼하 7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삼하 73 나단이 왕께 고하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삼하 7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삼하 7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삼하 7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삼하 77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삼하 7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삼하 7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 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삼하 7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삼하 7 11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 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삼하 7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삼하 7 13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예수는 자신이 성전을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주장한 죄목 즉 나단의 신탁에 따라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총독 빌라도에게 처형을 당했다. 성전은 그 당시에 유대인의 생활과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시고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시겠다고 하셨다. 자기가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으로 인하여 새로 탄생된 백성들로 새 성전을 지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요 2장의 성전소동사건은 단순히 성전에서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거나 성전청결 사건이 아니고 자기가 이 성전을 헐고 구속사건을 통하여 새로운 성전을 세울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데모이다. 시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소 당한 죄목도 성전에 대한 것이다. 네가 이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말한 자이냐 바로 네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이냐고 심문했다.

사실 이 질문은 두 개의 질문이 아니고 한 질문인데 다른 측면으로 두 번 질문한 것이다. 성전재건할 자와 메시야는 동일 인물이다. 예수님은 바로 성전 모독죄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구약배경은 삼하 7:12 - 14에 나오는 나단의 신탁이다. 즉 나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이다. 나단의 신탁에 의하면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씨를 통하여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하셨다. 삼하 7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다윗이 주변의 대적을 다 물리치고 그 백성에게 안식을 주고 자기는 궁궐에 거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하나님께 말씀 드렸다. 그러나 나단을 통해주신 하나님의 응답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집이란 다윗의 왕조(dynasty)를 의미한다. 여기서 집이라는 단어에 있어서 하나의 WORD PLAY 를 볼 수 있다.

다윗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그의 왕조를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다윗의 씨를 일으켜 왕조()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가 합법적으로 통치한다는 의미로 그를 나의 아들로 삼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의 성전을 짓게 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다윗왕조를 세운다는 말씀이다. 이 약속은 솔로몬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다윗왕조를 세웠다. 그래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그런데 솔로몬을 기점으로 다윗 왕조가 타락한다. 그리고 분열왕국이 되어서 타락해서 망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구약내에서부터 나단의 신탁이 다시 성취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여기서 구약과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야 사상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세워서 메시야를 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유래하는 메시야 사상이 강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세워서 다시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다윗의 씨인 메시야가 하는 일은 바로 성전을 짓는 일이다. 그 왕조와 하나님의 아들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왕조와 하나님의 아들(성경에서 아들은 상속자개념을 의미한다)사이에는 관계론적 의미가 있다. 메시야는 바로 다윗의 왕조를 재건할 뿐만 아니라 새성전을 세우실 분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왕조를 이어 받은 메시야라고 한다. 육적 다윗 왕가는 바벨론 포로로 끝이 났다. 그러나 영적인 다윗의 왕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승 되어졌다(1 : 1). 다윗의 씨(seed, 후손)가지또는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 메시야는 바로 성전을 짓는 자이다. 새성전과 메시야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속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모독 죄는 하나님에 대한 참람죄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죄인 것이다.

 

G. 예수님의 의도 -- 하나님 백성의 창조 - 새성전을 이루심

 

우리는 이전에는 죄와 죽음으로 특징 지워지는 사탄의 나라 백성이었는데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즉 하나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해서 의와 생명이 왕노릇하는 하나님 나라로 옮기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요에 참예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는 누구인가 교만한 宗敎指導者들이 아니고 바로 죄인과 창기들이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래서 그 당시에 불리웠던 예수님의 별명이 1) 탐식가 2) 죄인과 창기의 친구 3) 술주정뱅이(술을 즐기는 자)등이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約束으로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부요함에 동참케 해주셨다. 우리의 아빠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기도란 바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를 내것으로 끌어쓰는 것이다.(지혜를 주소서, 능력을 주소서, 연약함을 도우소서, 질고에서 건져 주소서 등)

영생이란 바로 신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비유로 시위하셨고, 치유를 통하여 그의 능력이 실제로 나타났다.

8 : 28 - 31(16:21이하 참조)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사역의 전환기를 가져온다. 그 때부터 임박한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하셨다.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드라마를 제시하신 것이다. 1) 시기 - 유월절 2) 재료 - 음식-생명 3) 몸짓 - 죽음 예수님이 떼어주신 떡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찧기실 살을 의미하며 잔은 우리를 위해 흘리실 대속의 피이며 언약의 피이다. 4) 말등 이런 것들은 전부 엄청난 상징을 갖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

 

시기는 兪越節이다. 유월절을 지킴은 바로 출애굽의 첫 구원을 기념하고, 종말에 있을 제 2 의 출애굽 즉 종말의 구원을 염원하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등 음식은 生命을 주는 것을 상징한다. 몸짓은 부수고 포도주를 붓고 하는 것은 잔인한 죽음, 최후의 만찬 때 즉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한편의 (드라마)으로 마디 마디마다 엄청난 意味를 부여해서 말한다. 즉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제 2의 출애굽을 이루는데 그 구원을 어떻게 이루는가 ? 자신을 스스로 죽음에 내어줌으로써 그리고 말을 보면 잔의 말씀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言約의 피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사 53 : 10引用이다. 예수님의 十字架에서의 죽음은 사 53 :10에 근거한 대속적 제사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바로 이사야서에 인용된 여호와의 의 죽음이라고 한다. 패역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스스로를 代贖의 제사로 바쳐서 백성의 가 용서되고 그들을 의롭게 함이 내용이다. 바로 그것이 바로 예수 자신의 죽음의 의미라는 것이다. 言約의 피라는 말은 출애굽기 248절에서 왔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한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새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언약적 죽음이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되게() 하기 위한 죽음이다. 24 : 8에 보면 모세가 언약의 피를 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의 예식을 취한다.

24: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 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즉 언약을 맺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백성됨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렘 31 : 31이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새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한다. 새언약의 내용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마음의 동기에서 시작된다.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언약을 세 우리라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 을 파하였음이니라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 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 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 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시대에 모세를 중보자로 맺은 옛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답게 살지 못한다. 즉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약을 어겼다. 그래서 새언약을 약속하셨다. 히브리서 8장과 10장에 보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이 새언약을 성취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종의 노래라고 하는 사 42 : 8과 사 49 : 6에서도 종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또한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과 아담사이에 단절되었던 교제를 회복시키어 의로운 새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예수는 자기의 죽음을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 죄가 용서되어 의로운 하나님 백성을 창조되는 사건으로 그린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왕노릇하시고 아비 노릇해주심에 의해 살 수 있는 백성들을 창조함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인간이 다시 한번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르게 연결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해 주심에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생명을 얻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런 구원을 이루는 사건이라고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해설해 주었다. 제자들은 별로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의도는 우리에 대한 초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초대이다. 잔치와 상속의 약속이 있다. 그것은 영생의 약속이다. 사단의 죽음의 나라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죽음의 증상을 고치는 치유로서 시위하면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약속과 죽음과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다. 죽음은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인데 이로부터 의로운 하나님의 새백성 창조가 된다. 그의 하나님의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겠다는 초대인데 그의 죽음은 그 약속의 제의적인 성취이다. 그래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는 약속과 성취이다. 이때까지도 제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야 사상과 너무나 동떨어져서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것인데 그래서 제자들이 모두 도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고(1:15),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그의 약속을 성취하셔서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면 부활은 무엇인가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십자가를 통한 속죄제사와 새 언약의 성취를 인치는 것이 부활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켰다. 부활한 예수의 나타남을 본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옳다고 인정하고 높이신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고전15:3-5,4:25,고후5:21)는 것이 초대교회 때부터 신앙고백과 케뤼그마가 되었다.

구원이나 영생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神的인 삶이 바로 永生이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은 매우 긴장의 관계에 있다. 현재(부활과 재림사이)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각축장이다. 사단은 우리에게 자기주장하고 이웃을 착취하라고 하고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존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바울의 표현대로하면 사단은 육신대로 살도록 하고 하나님은 성령의 지시대로 살라고 한다.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지금 임시적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사단의 나라가 사단의 통치가 완전히 극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좇아 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 ? 아닌가 ?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 육신을 따라 살 것인가 ? 매 순간 직면한다. 그 때마다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의 市民權은 하늘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땅위에 살지만 사단의 나라에서 이미 벗어난 자들이다.

 

1:1·3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우리를 사단의 암흑과 죄악과 죽음의 나라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겼다. 우리의 신분이 거기에 있다.

교회는 바로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이다. 그러므로 본국의 법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의 열매 샬롬이 확대된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사단의 나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우리가 매순간마다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다.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생명 가운데 동시에 산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지만 우리는 손해를 본다. 그래서 구원과 고난이 함께 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과 구원이 함께 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12 :1,2과 빌 1:27에 의하면 교회는 식민지로서 본부의 지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5: 22, 23에는 성령의 열매가 묘사되어 있다. 매 순간마다 육신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고난 속에서 살아간다. 고난은 구원을 가져오고,죽음은 생명을 가져온다. 우리들이 인간사회에 살려면 자신이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구원과 고난이 함께 공존한다. 인간의 내재의 삶속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겠는가 ? 우리의 구원은 초월해서 와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병든 사회를 사랑 외에는 치유할 힘이 없다. 구원은 바로 사랑의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긍극적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퍼부어주는 은혜로 우리가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하나님 나라는 그만큼 확대된다. 자기 주장을 하지 않으면 거기에 샬롬이 이루어지고 그만큼 나도 덕을 보게 된다. 결국 하나님 나라가 구원이 확장되면 우리도 덕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남에게 덕을 입히지만 나는 손해를 볼 수 있다. 그것이 예수가 말하는 복음을 위한 고난이다. 생활속에서 죽는 것이 복음을 위해 고난 받으며 사는 것이다. 복음을 위한 고난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16:24). 종말론적 긴장의 관계이기에 재림 때까지 이러한 긴장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와서 구원이 여기 있는데 왜 고난이 있는가 ? 바로 구조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로 살게하면 우리의 고난도 적어진다. 다함께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면 내가 손해를 보니까 ? 전도를 더 열심히 해야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지 완전한 구원이 없으나 구원이 더 확장되면 복음선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더 확장되면 샬롬이 커진다. 종말에 가면서 고난이 더 커진다고 예수님은 말하고 있다. 종말에 가면서 구원도 증진되고 고난도 더 증진되는 역설이 있다. 우리가 믿는 바가 얼마나 훌륭한가 ?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얼마나 위대한 구원의 소망을 갖는가 ? 우리가 기도로 날마다 구원을 체험한다. 아빠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우리 삶에 부분적으로나마 임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