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특강(김세윤교수)

 

데살로니가전서의 역사적 배경

1. 데살로니가는 어떤 도시였는가?
데살로니가는 중요한 항구도시(무역로)였으며 또한 이 도시는 당시 로마의 중요한 군사도로의 선상에 있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는 로마로부터 마게도니아 행정구역의 수도로 정해져서 경제적으로 번창한 도시였으며 아울러 상당한 자치권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로마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2. 이 지역은 어떠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가?
이 지역 사람들은 제국숭배 사상에 헌신적이었으며 아울러 여러 신비종교가 혼합되어 있는 다신교적 사회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종교는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것이었는데 이 종교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으로 삼고 성적 탐닉을 통해서 풍요를 기원하는 생식종교였다. 그래서 이 종교 때문에 마게도니아 지역은 지나칠 정도로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지역이 되었다.

3. 바울은 이 지역에서 어떻게 선교활동을 폈는가?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의 기록에 의하면 3주 정도 머물면서 유다 회당으로부터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대회당에는 소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 불리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들 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도덕적 타락과 불합리한 지적 세계에 회의를 느끼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던 중에 유대교로 전향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런데 회당에서 전한 바울의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배척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는 환영 받는 경향이 있었다. 그 이유는 유대교의 강한 민족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이들 개종한 이방인들은 그들이 아무리 열심이 유대교를 믿는다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으로부터 소외되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차별된다고 주장되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는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사건은 이들에게는 정말 복음의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로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은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하부계층 출신자들로서 사회적 냉대를 받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전1:26). 그러나 바울은 이런 자들 뿐만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 중에서 아주 부유하고 활동적인 여성들도 얻은 것 같다(17:4)

4. 바울의 여행경로
사도행전16장을 통해서 바울의 여행경로를 살펴보면 바울은 드로아에서 본 환상 중에 계시를 받고 마게도니아의 첫 성인 빌립보에 가서 선교를 하고 이후에 그의 동역자였던 실라, 디모데와 함께 로마 군사도로를 통해서 마게도니아의 수도였던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도중 역시 유대인들로 부터 배척을 받아 성도들의 도움으로 베뢰아로 도망왔는데 살전 2:18절에 의하면 그가 다시 베뢰아에서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행과 떨어져 혼자 아데네로 내려갔다가 고린도로 갔는데 거기서 바울은 간절히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가 떠나온 데살로니가 형제들은 불과 2-3개월 밖에는 바울과 함께하지 못했던 연약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디모데로부터 전해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소식은 아주 기쁘고 놀라운 것이었다(3:2-6).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 및 문제들

1.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주 어린교회였다.
왜냐하면 길어야 겨우 3개월간의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어렵게 이루어진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충분한 가르침을 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바울은 자비량으로 선교활동을 폈으므로 이들에게 기독교적 가르침을 줄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연한 결과지만 이들의 신앙은 아주 어리고 유치한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체계화된 신앙과 조직적인 교회 공동체를 이루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전1:6-10절에서 바울이 칭찬하는 것처럼 그들의 신앙이 모든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의 다른 교회에 모범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2.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받고 있었다.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 도시의 시민들을 충동질해서 바울이 선포한 것은 더 이상 유대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당시에 로마 통치자들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유대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 많은 특권을 주고 있었는데 만약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주장한 바와 같이 기독교가 개혁유대교 내지는 더 나아가 유대교의 완성으로 로마통치자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기독교 역시 로마의 보호 하에 들어가서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특권이 생길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염려한 유대교도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에 대해 이단으로 비난하고 더 나아가 로마에 대한 반역행위를 조장하는 종교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예수단의 두목으로 바울을 지목하여 공격하였다.
그런데 유대교도가 바울를 공격한 공격수단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울을 떠돌이 스토아 혹은 냉소주의 철학자로 매도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런 자들은 부유한 도시를 찾아 다니면서 영생이나 구원에 대한 지식이나 또는 행복한 삶의 지혜와 같은 것을 나누어준다고 떠벌리면서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때로는 비리로 전락해서 많은 비난을 사기도 했는데 바울이 바로 그러한 자의 한 사람으로 매도된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비판을 앞세워서 새롭게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을 회유해서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종교심을 버리고 유대교로 다시 회귀하기를 종용하거나 만약 그들의 회유에 응하지 않는 경우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해서 가혹한 핍박의 화살을 거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 이들은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신세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했던 그들의 영적 아버지 바울이 그들을 떠나갔으므로 거기서 성도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불안감은 그들 마음을 짓누르기에 충분했으며 게다가 바울이 곧 돌아온다고 했던 그 약속마저 끝내 지켜지지 않음에 따른 그들의 실망감은 큰 것이었다.

4. 성적타락에 대한 심각한 도전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도시의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그들에게는 성적 타락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있었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와 같은 생식종교가 발흥하고 있었던 당시에 사회상은 일반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적 문제는 죄이거나 부끄러운 행동으로조차 여겨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런 죄악된 삶에 젖어 살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을 통하여 회심한 이후라 하더라도 갑자기 그리스도인들로서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삶으로 돌아서는 것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된 이상 이들은 절대로 이전의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저지르는 것과 같은 성적 타락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야 했으면 또한 강력하게 그 삶을 실천하도록 권면하여야만 했다. (4:3-8).

5. 재림전 죽은 자들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한 신학적 문제
또한 이들에게는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가 있었다. 아마도 데살로니가 성도들 사이에는 살아서 재림을 맞아야 구원을 얻고 재림 전에 죽은 자들에게는 구원받음에 있어서 상당한 불이익이 있다고 생각해서 먼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슬퍼하고 걱정했던 것같다(4:13-18).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즉 종말의 때에 대한 아주 과도한 관심 때문에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성도들 사이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그리스도가 오는 때는 언제냐를 놓고 토론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또 일부 과격한 성도들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한다고 하면서 직업을 갖지 않거나 일 손을 놓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무위도식하며 지냄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 경제적으로 굉장한 무리가 갔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의 직업을 가지며 열심히 일하라고 권면하여야 했으며(4:11-12) 또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후서에서는 강경한 어조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3:6-15)라는 언급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6. 교회내의 무질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조직적으로 아직 리더쉽의 구조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기준으로 세상적인 높은 지위에 있었다던가 혹은 카리스마적 은사가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인 리더쉽이 생겨 났는데 이것이 신학적으로 제도화되지 않아서 종종 이런 리더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사게되거나 하는 경우에는 교회 공동체 전체가 무질서한 상태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편지의 후반부에서(5:12-22) 여러 권면을 하는 중에 바울은 이런 자연발생적인 리더들에 대해서 교회가 그들의 리더쉽에 순종하고 협력하여 선한 일을 이루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난 특이한 표현들

1. 수사학적인 의도를 갖고 있는 칭찬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쓴 그 어떤 다른 서신보다 성도들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 찬 서신이다. 그런데 이러한 칭찬의 표현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사도바울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표현인 것이 분명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분히 수사학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표현들이다. 즉 바울은 이러한 칭찬의 표현들을 통해서 연약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인정해주고 추켜세움으로 지금까지 그들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훌륭히 지켜온 그 덕목들을 유지하며 계속 그 길을 걸어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첫번째 부분은 1:6-10절로 이제 신앙생활한지 겨우 4-5개월밖에 안된 자들을 말하면서 이들이 이 마게도니아 전체 기독교인들의 본이 되었다고 대단한 칭찬을 하고 있는 바울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연관된 성경구절인 고후8:1절을 통해서 알아보면 "마게도니아 교회(데살로니가 교회와 빌립보 교회)가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있고 극한 가난 가운데에서도 풍성하게 연보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단순히 수사학적인 언급으로만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들은 핍박과 극한 가난 가운데 에서도 훌륭한 믿음을 양태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칭찬하고 있는 부분은 2:13-14절인데 여기서 바울은 그와 떨어져 아무런 신앙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도 바울이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여러가지 핍박과 어려운 상황을 믿음안에서 잘 견디고 있는 성도들을 칭찬함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아울러 그들이 받는 고통과 고난은 전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함께 겪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상기시킴으로 그들을 위로하려는 수사학적인 의도도 함께 갖고 있다.

세 번째 칭찬하는 부분은 3:6-10절로 연약한 성도들은 남겨둔 채 데살로니가를 떠나온 바울이 그들에 대한 걱정으로 노심초사 하다가 고린도에 머물고 있을 때 디모데로부터 좋은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 마음에 기쁨과 위로가 넘치는 상태에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부분이다.

네 번째로 4장에 들어서서 바울은 4:3-12을 통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화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당면한 도덕적이고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강한 어조로 명령하며 심각하게 교훈과 권면을 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언급을 하기 전에 먼저 4:1-2에서 "너희가 우리에게 받은 바대로 잘 행하고 있다"라고 우선 칭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권면의 말을 하는 도중에도 너희에게 더 이상 쓸 말이 없다”(4:9-10) 라고 그들을 또 한번 추켜세우고 있는데, 이러한 모든 칭찬들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성화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우선 칭찬해주고 인정해 줌으로 바울의 말에 그들이 온전히 순종하기를 바라는 교육적 효과가 그 이면에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데살로니가교인들에 대한 사랑의 바울의 사랑의 표현

데살로니가전서와 빌립보서는 목사 바울의 자기 양떼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아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나타나는 곳인데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그러한 표현들을 먼저 2장과 3장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2:19-20"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하는 언급은 빌립보서 4:1(고후1:14, 2:16)에도 나와 있는 말로 바울의 성도 사랑에 대한 아주 유명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과 자신의 관계를 아주 가까운 가족적 유대관계를 나타내는 그림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2:7에서는 '유모'2:11에서는 '아비'2:17에서는 '고아'(개역성경에는 너희를 떠난 것이라고 표현되었다)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고아는 바울 역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떨어져 매우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는 동변상련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이러한 감정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는 부분은 바로 3:1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라고 말하는 부분인데 이 말은 바울이 아덴에 홀로 떨어져 있기를 감수했다는 말이다. 즉 디모데와 동료들을 데살로니가에 보내고 스스로 자기 혼자 떨어져 남는 일을 감당했다는 말인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이 그들을 떠난 것 때문에 버려진 것과 같은 느낌을 갖는다면 나 역시 너희를 그렇게 보기를 원했으나 가지 못하므로 내 동료들을 다 보내고 나 혼자 남아 '방기'되는 경험을 했다는 말이다. 이 말을 한 이후 3장 전체를 걸쳐 바울이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안녕에 대해서 얼마나 큰 관심과 걱정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간절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대조

바울은 이 서신서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대조하여 보여줌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 백성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종말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라는 그 신분에 대한 의식을 강화한다.

1:4 너희는 선택받은 자들이다.
1:9-10 너희가 우상 섬기는 자들로부터 분리되어서(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며 그래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심판(장래 노하심)에서 구원 받을 자들이다.
2:13-16 유대교회가 동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듯이 너희들도 너희 동족들로 핍박을 받는다. (데살로니가 교인과 그들을 핍박하는 동족들을 대조하고 있다.)
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
4:7 우리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받은 자들이다.
4:11-13 여기서는 외인들과 소망 없는 다른 자들과는 다르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의 질서가 교회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명성을 가져와야 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대조하고 있다.
5:13-15 교회 내에서 피차 대할 때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사랑으로 대하라.

이러한 모든 언급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선택 받은 자들로서 참 하나님을 섬기는 구원 받는 백성임 확인시키고 종말에 하나님의 진로로부터 구원 받지 못할 자들과 대조 시킴으로써 이제 막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서의 자기 의식을 심어 줄려고 한다. 즉 바울은 이들에게 소위 말하는 재 사회화 작업(resocialization)을 하려는 것이다.

4. 데살로니가전에서 나타난 믿음 이라는 단어
데살로니가전서의 이 짧은 편지에 믿음이라는 말이 1:3, 8, 3:2, 5, 6, 7, 10 5:8에 걸쳐서 8번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빈도가 얼마나 많은가를 비교해 보려면 고린도전서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7번 나오고 고린도후서에도 7번 그리고 빌립보서에도 5번 밖에 안나오는데 데살로니가전서 이 짧은 편지에 그것도 바울의 초기 편지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8번 나오는 것이 매우 많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8번의 믿음이라는 말은 "너희 믿음"이라는 문형 속에 대부분 나온다(1:8, 3:2, 5, 6, 7, 10).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바울은 "너희 믿는 자들"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이런 문구들을 통해서 보면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을 결정하는 요소임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익숙한데 이것이 종교사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특이하고 새로운 현상이다. 다른 종교들 특히 인도계열의 힌도교와 개혁 힌두교라 말할 수 있는 불교에서는 믿음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이 강조되고 있다. 지식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헬라종교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도 지식을 강조하는 것에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 종교의 특징을 덧붙인다면 이들 종교들은 선행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개의 종교는 지식과 선행을 구원을 얻는 방도로 주장하고 여기에 더불어 첨가되어지는 것이 신비주의적 요소로써 우주적 신과의 합일, 요가, 참선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 종교에서는 믿음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또한 구약에서도 믿음이란 단어 자주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올 때에는 아주 의미심장하게 나온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갑자기 믿음이라는 어휘가 아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새로운 종교적 현상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다름 아닌 바울이 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믿음이 바로 우리와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의 사건을 연결시키는 도구이고 또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도구인 것을 아주 강조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믿는 바 구원의 사건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우리의 믿음으로 마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시키는 이 '믿음'이라는 말의 근본 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믿음의 가장 근본 의미는 다름 아닌 '선포된 이 기쁜 소식을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객관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리스도안으로 내포시킨다.
왜 그러한가?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 대표이자 대신이니까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대표하심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동시에 새 인류의 조상인 그리스도의 몸 속으로 우리를 내포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울은 종종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결국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속으로 내포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그 존재가 결정된 자라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여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하므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한 일로 인정되고 그리스도의 됨됨이 우리의 됨됨으로 간주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하나님 앞에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우리 죄를 대속한 것이 우리의 죄가 없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됨에 우리가 참여하여 우리가 하나님 아들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내포시키고 그리스도 안으로 연합시킴으로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이 바로 오늘 나에게 그 효력을 발생시키도록 한다. 바로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이고 또한 이 믿음으로만 이 구원의 사건이 바로 오늘 나에게 주관적 구원의 사건으로 효력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칭의'라는 것 역시 우리가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사함을 받아 우리가 의인이라는 무죄선언됨을 의미한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말은 종교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기독교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 보이는 단어이다.

데살로니가 전서의 전체구조

1: 바울의 인사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감사
1 보내는 이, 받는 이, 간단한 인사
2-10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감사1
2-5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감사의 내용
2-3 감사의 내용
4 택함 받음에 대한 확인
5 사도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자기이해
6-10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인 믿음의 본의 내용
6-8 각처에 퍼진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소문
9-10 불신자들과 구별된 삶을 사는 데살로니가 인들의 믿음의 본

2: 바울의 사역자로서의 자기이해- 사도 바울의 자유함과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증
1-4 바울의 복음전도의 순순한 동기
5-8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참된 권위
9-12 바울이 흠 없는 행실로 보인 모범
13-16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감사2
17-20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간절한 사랑
17-18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간절한 바람
19-20 성도를 향한 사랑의 표현 (cf. 4:1, 고후1:14)

3: 목사로서의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을 향한 관심과 걱정과 염려
1-5 디모데의 파송
1-2 바울 스스로 동료들과 떨어져 있음을 감수함
3-4 교회가 겪는 핍박과 환란에 대해서
6-8 디모데의 보고
9-10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감사3(바울의 평안과 위로받음)
11-13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간구1

4 장 성화의 삶에 대한 권면과 종말에 대한 신학적 문제
1-2 성도들의 노력에 대한 칭찬과 인정
3-8 성적 타락에 대한 강력한 권면 성화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
9-10 칭찬을 통한 권면
11-12 무위도식하지 않기를 권면
13-18 종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수정

5장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학적 문제와 교회를 향한 일반적인 권면
1-3 재림의 시기
4-11 빛의 자녀들
12-22 일반적 권면들
12-13 지도자를 인정하라는 권면
14-15 교회 안팎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태도
16-18 모든 사람에게 항상 선한 자로서의 행해야 할 3중 권면
19-22 교회내 질서을 위한 은사의 사용과 영적 분별력
23-24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간구 2
5:25-28 맺음말 인사와 축도

각 장별 해석의 요체
1

5-6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본받는 순서가 의미심장하다. 즉 우리를 본받고 그 다음에 주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종종 스스로를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데 고전4:16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하고 있으며 고전11:1에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개역성경에서는 어순이 바뀌어 쓰이고 있는데 원래 어순은 "너희는 우리를 본받는 자가 되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라고 되어 있다)고 말함으로 살전1:6과 순서가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의도적으로 정한 이 본받는 순서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사도바울의 사역자로서의 굉장히 높은 소명과 높은 사명의식을 엿볼 수 있다. 즉 복음 선포자는 복음을 말로 선포하지만 그러나 말로만이 아니라 그 삶으로 복음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함에 있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 또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 사건을 계획하셨다는 이 복음은 말로만 선포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려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4:10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함으로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역자가 복음으로 가르치는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는가 하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주의 사역자가 말과 삶으로 그려내는 그 주를 우리의 회중이 알고 본받게 되는 것이다. 회중은 그 사역자를 통해서 주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소명에는 위대한 사명이 같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누구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말로 그리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삶으로 그리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자기 희생과 부정의 삶, 섬김의 삶을 나타내지 않으면 영적 도덕적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오늘 사역자의 권위 위기의 본질이 있을 것이다.

9-10
7-8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전파된 복음이 이윽고 다른 마게도니아 교회에 전하여지며 그들의 굳건한 신앙이 다른 모든 곳에 좋은 소문이 났다고 말하는데 그 소문이 난 실제 내용이 바로 9-10절이다. 그런데 우리가 9-10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데살로니가전서의 성격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성격은 굉장히 짧은 편지로 위기의 상황 속에서 굉장히 서둘러 쓴 편지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무엇보다 그들의 신앙을 칭찬하고 북돋아 권면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과 좋은 관계에 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로써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면한 몇 가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만 충고하는 편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몇몇 다른 편지들과 같이 유대주의자들의 도전에 대응하는 내용이 전혀 없는 편지이다. 그리고 단순히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침을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선포한 복음을 다시 깊이 해석한다거나 변증하는 내용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이런 몇몇 문제들을 권면하는 중에 행간에 암시되어져 있는 것을 읽을 수는 있는데 9-10절 부분도 바로 그런 부분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바울의 칭의론의 기본적인 요체와 또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그 정의를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심판의 때에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진로 하심에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무죄함으로 판명되어 의인으로 선언되어는 칭의론의 기본적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아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분이라는 기독론의 요체가 암시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9-10절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자 기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로 회심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면은 이방인 교회에게 행하는 바울 설교양식의 한 전형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우선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로 회심함의 순서는 우리에게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예수님께서도 우상을 버리지 않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 회심함이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신 바가 있다(6:24, 16:13, cf. 고전 10:21).
그 다음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 회심한 그 결과가 10절인데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오는 종말론적 구원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구원 받는 강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함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다. 바울은 이 분을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과거)으로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현재) 미래에 하늘에서 다시 오실 분으로 알며 종말에는 우리를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실 분으로 '아들'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해는 바울이 롬1:3-4, 고전15:24-28 2:9-11 3:20-21 등에 나타내었던 것들과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하여 롬1:2-4, 9, 16-17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복음에 대한 정의를 두 가지로 하고 있는데 먼저 롬1:2-4에서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정의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섬긴다고 9절에 말하고 있다. 또한 롬1:3-5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져서 하나님의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셨다"는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결의 영으로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 창조주로서의 온 우주에 대한 권세를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백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예수는 만유의 주(퀴리오스),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빌 3:20-21에서는 "우리가 하늘 시민으로서 막강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늘에서 올 우리의 구원자를 기다린다"라고 쓰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천한 몸을 자기의 영광된 구원의 몸과 같이 변화시키실 것인데 우리가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1:10절을 보면서 '아들'이라고 말할 때 가장 기본되는 의미는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대권의 상속자"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대행하기 때문에 주 예수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의 구원의 힘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고 그의 구원의 행위가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인 것을 10절에서 포괄적으로 전제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여기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대권자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한다.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무죄선언 하실 수 있었는가?(칭의와 무죄 선언은 결국은 같은 말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10절과 4:145:9-10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그의 대속의 죽음을 우리가 이해하여야 한다. 즉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권을 행사하시는 이 분은 다른 분이 아니고 우리 죄를 위해서 스스로를 대속의 제사로 바치신 분이신 것이다(아멘! 우리가 어찌 이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에 겨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그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의 제사의 덕을 입어 하나님의 진로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라는 복음은 초대교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케리그마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초대교회의 기본 복음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고전15:3-4 인데 이 부분을 우리는 소위 사도적 공통복음이라고 부른다. 거기서 사도들이 공통적으로 합의하며 전파한 복음은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그리스도가 장사되었다는 것(땅에 묻혔다)" 그리고 "그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성경대로 일으켜졌다"는 것이다. 이 역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 신앙고백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후 2000년의 모든 기독교의 역사도 이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이 복음은 로마서 5:9절에서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함으로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그의 대속의 제사로 지금 현재는 의인으로 이미 선언되었고 그래서 미래에 최후의 심판 때에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즉 칭의에는 현재와 미래 두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단계가 어떻게 관계 있는가? 그것은 미래의 하나님의 심판은 지금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지금 현재의 의인 선언의 확인이다 . 다시 말하면 미래에 최후의 심판에서 무죄로 선언되고 의인으로 선언될 것을 지금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현재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최후의 심판 때의 칭의의 선취이고 현재에서 미래를 바라보면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대속의 제사에 힘입어서 우리의 죄가 다 용서되고 씻겨지고 덮어지고 그것이 미래에 다시 재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살전 1:9-10에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다는 케리그마 가운데 그 가장 핵심이 되는 죽음의 형식을 암시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미래에 우리를 구하는 것은 그의 대속에 힘입어서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는 분이라는 것을 또한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사상을 좀 더 정확히 파악하려면 연관되는 성경구절인 갈4:4-5, 1:2-4, 9, 16-17, 7:24-8:4 8:28-39과 같은 부분과 같이 살펴보아야 하는데 먼저 갈 4:4절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때가 차서 구원을 성취할 때가 이르매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셨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일명 sending fomula 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 보내심의 목적은 항상 구원이다. 이어서 갈4:5-6에서는 그 구원이 이중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속량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가지는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첫번째 목적인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한다는 말은 율법의 저주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자 하나님의 진노의 근거이기도 하므로 하나님으로 진노로부터 우리를 속량한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다른 성경구절인 롬7장과 8장에 걸쳐서는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보냄의 형식을 시작으로 구원의 과정과 목적을 서술하는데 특히 8:28부터 시작해서 39까지 구원의 확실성을 아주 장대하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종말의 심판 때까지 지키신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바울은 여기서 예정론에서부터 시작하여(8:29-30) 구원의 확실성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그래서 30절에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 어떤 존재도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이 문맥 중에 바울은 8:34절에서 우리 구원이 확실한 또 하나의 이유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보좌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하심을 들고 있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이 바울은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부분을 굉장히 확대하여 독특한 기독론으로 전개한 부분이 히브리서인데 거기서도 대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 제사장노릇하는 것과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서 자신의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를 근거해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하신 다는 대 제사장의 기독론이 대표적으로 히4:14-16절에서 멋지게 서술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롬1:16-17절을 통하여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정의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구원의 힘인 복음과 그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한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이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는 우리는 의의 '관계론적 개념'을 살펴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의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하나님 노릇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언약행위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는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이미 담겨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순종했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 의의 관계론적 개념으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각자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바로 이 '' 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의 불의한 모습에 화를 내시며 아버지 노릇을 안하시면 이번에도 하나님 편에서도 불의한 것이된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관계론적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의무를 다 하지 않으신 것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쁜 소식 복음은 인간은 불의해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이다. 이때 의는 관계에서 나온 의무를 다함, 자기 약속을 신실히 지킴, 즉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를 통해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특별히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심으로 약속을 신실히 시키셨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가 전 인류에게 나타난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신 사건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해 내어주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신 절정의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술에는 항상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하심이 드러난다. 다른 말로 창조주가 우리를 사랑하심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사랑과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하신 것이다. 거기에 죄악의 구렁텅이이 빠진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 우리 죄를 덮어버리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인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그리하여 곧바로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다름 아닌 칭의이다. 그래서 칭의가 법정적 개념으로 쓰이면 우리에게 무죄선언하신 것이고 또한 이것이 관계론적 개념으로 쓰이면 하나님이 우리와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심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냐면 그의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심으로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을 당하시고 부활하시어 지금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분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 가능하여 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들어 있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들이다.

2
1-12은 바울의 목사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이 부분은 전통적으로 바울의 자기 사도직에 대한 변증의 부분으로 보았는데 왜 바울이 연약한 신앙인들인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증하는 것이 필요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가 역사적인 배경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떠돌이 냉소주의 철학자로 매도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외양적으로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떠돌이 냉소주의 철학자들과 별반 틀릴 것이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점을 악용하여 유대교를 떠나 새롭게 그리스도인들이 된 연약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미혹하였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이 스스로 자기 변증을 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더 나아가 자비량 원칙을 아주 고집스럽게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통해 떠돌이 스토아철학자들이나 혹은 냉소주의 철학자들과 차별화를 이루려 한 것이다.

그러면 바울의 변증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2-4
2-4을 통하여 바울의 사도로서의 자기 이해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복음전하는 자로 인정됨'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전할 사명을 위임 받았다는 것이 바울의 사도로서 자기이해의 기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다(4)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빌2:1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의 태도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면서 그의 사도직을 감당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도로서의 자기이해는 고난과 능욕을 당하는 중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했으며(2) 또한 복음을 전하는데 옳지 않는 동기로 전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솔직하고 투명하게 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3).
그러므로 당연하게 그는 인간들로부터 자유하며 5-6절에 나와있듯이 탐심의 탈을 쓰지 않고 또한 사람들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사도 바울은 아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거나 평가가 전전긍긍하지 않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6-7
6절에 나와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권세를 행사할 수 있으나)”란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재 확인하고 있는 것인데(고전9:14) 이 사도의 권세를 말하면서 자신은 그런 영광을 구하고 있지 않고 도리어 유순한 자가 유모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돌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바울이 자기의 권위에 대해서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편지이다. 또한 데살로니가전서의 전체가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혹은 명령하는 글들이다. 그래서 아주 상징적으로 2:11절에서 '위로한다'라고 쓰인 단어가 이중적으로 '명령한다'고 쓰이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체에서 특히 4장의 곳곳에서 부드럽지만 강한 권면이나 명령을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의 구체적인 지시와 명령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나타내고 있지만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 권위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직위를 힘입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모든 권면이나 명령은 자기의 봉사에 근거해서 겸손하고 유순한 섬김의 자세와 유모의 모습으로(6-7) 혹은 자비량 함으로써(9) 얻은 사도의 권위를 힘입어 권면하고 명령하고 지시하고 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기의 희생적 봉사에 근거해서 영적 도덕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높은 사도적 권위의식을 나타내지만 절대로 권위주의적인 것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아서 사심이나 탐심이 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함으로 얻은 영적 도덕적 권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권위는 전적으로 복음을 위한 권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스스로 희생하면 힘들게 자비량의 원칙을 고수한 것도 자신이 떠돌이 철학자 정도로 권위가 떨어지면 그들의 철학적 지식과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동일시 될까봐 그가 스스로 높은 영적 도덕적 권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가지고 높은 선교의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세를 부리거나 주장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의 하는 말이나 그의 모든 가르침은 함부로 거역할 수 없는 상당한 권위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사도의 진정한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사도의 참 권위주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자로서의 자기 이해를 갖고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정직하게 전할 때 그리고 자신의 탐심이나 유익을 위해서 인간들과 타협하거나 아첨하지 않고 사도로서 자세를 견지할 때 참된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럴 때 사도 바울은 진정한 사도의 권위는 말씀의 권위이지 직위의 권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자신의 행위를 한마디로 거룩하고 옳고 흠 없는 삶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자비량 원칙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다른 각도에서 좀 더 심도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자기 손으로 육체적 노동을 통해서 자기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한 이 태도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만 하는 원칙인가? 우리는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마땅히 본받을 만한 부분이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교회로부터 마땅히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바가 있다(10:10, 10:7). 그래서 바울 이외의 다른 사도들은 심지어 아내까지 동반하고 다니면서 교회로부터 헌금지원을 받아 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전 주께서 주신 이 권한을 일체 쓰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9).
이렇게 바울이 굳이 자비량 원칙을 고수하려 했던 그 의도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 했다. 즉 지식을 돈을 가지고 파는 스토아철학자들이나 혹은 냉소주의 철학자들과 차별화를 이루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그들이 전하는 철학적 지혜의 사변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또한 더불어 누구에게도 신세나 빚을 지지 않으므로 복음을 전함에 있어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하려한 바울이 강한 의지의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바울의 그러한 의도를 우리가 충분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바울이 마치 예수의 말씀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굳이 취하느냐 하는 것이다(사실 이 부분은 자유주의 학자들로부터 예수와 바울의 신학적 연관성에 대해서 공격 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자구적인 해석보다 그 정신을 구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즉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수단을 찾으려고 복음을 전하는 그 자세와 방법을 차별화하며 복음의 은혜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자비량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 태도는 예수 말씀의 자구적인 해석보다 더 철저하게 예수 말씀의 실천하고 삶속에 구현하려고 노력한 증거인 것이다.

적용점
목사가 자기 회중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지 않고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자의 자세로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온전하게 전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던지는 큰 교훈이자 도전인 것이다. 사역자가 이런 자세를 갖고 있어야만 인간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인간적인 탐심으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다.

아울러 사도 바울의 자비량 원칙이 주는 모범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원래 우리에게 준 교훈이 정상적인 것임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만약 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전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훌륭한 태도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떠한 태도라도 취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3
3장은 전체가 목사로서의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를 향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 내용은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안녕에 대해서 큰 관심과 걱정과 염려를 표하고 있으며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에 바울은 자기를 대표해서 디모데를 보내고 편지를 써서 그들을 격려했으며 나중에 디모데가 바울을 위로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4

1-8
1-8절까지는 데살로니가 인들의 성화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는 부분이다. 먼저 바울은 1-3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는데 즉 성화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언급하는 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이중계명에 다름이 아닌 것을 보게 된다. 즉 하나님을 혼신을 다하여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앞에 나온 1:9절에서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라는 것으로 이미 표현되었고 이제 이 부분에서는 후자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언급함에 있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마땅히 이웃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대 전제하에 음란의 죄는 바로 이웃사랑에 대한 거스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음란은 배후자의 권리를 뺏음이요, 이웃사랑에 대한 거스름이며 음란 행위의 대상자에 대한 착취라는 것이다. 특히 이 일이 형제에 대한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한 포인트를 접하게 된다. 그것은 빌립보서 3:5-6 1:13-14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 되기 전에 바울은 율법의 기준으로 말한다면 바리새인이자 율법에 대해서는 흠이 없는 골수 유대신학자요, 또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이단자를 단죄하는 교회의 핍박자였었다. 그리고 유대신학자로서의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율법에 담겨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바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서 명확하게 재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이 율법에 근거해서 음란을 금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이제 바울은 율법은 싹 무시하고 (살전후에는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한번도 안 나온다) 대신 하나님의 뜻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대치하고 있다. 이는 바로 롬10:4의 위대한 천명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라는 천명과 동일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서는 임시로 계시되었지만 그리스도안에서 더 완전하고 풍부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성도의 올바른 삶을 규제하지 더 이상 율법에 호소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바울의 칭의론의 중요한 초석이다. 즉 율법의 행위로 우리가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힘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아래에서 그의 주권에 순종함으로 비로소 우리가 의인이 되고, 의인으로 지탱이 되고, 그의 재판정 앞에 섰을 때 의인으로 확인될 것이다.

7절에 나타난 '우리의 부르심'에 대한 것은 이미 2:12절의 "하나님이 그의 나라와 영광 속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라는 말과 마찬가지고 구원받음에 있어서 은혜의 부르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5:9절에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요"(좀 더 확실한 번역은얻도록 예정하신 것이요”)에 나와 있는 '은혜의 예정', 그리고 1:4에 나타나고 있는 '은혜의 선택'과 더불어 구원의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성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3-7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이루어야 할 도덕적 성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바울은 이 도덕적 성화를 온전하게 이루어가려면 8절에서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화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성화를 구원의 은혜를 입어 거룩하다 칭함을 입은 칭의 사건 이후에 일어나는 칭의의 현재적 진행상태로 이해하는 것으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성화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로마서 8장의 핵심내용을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러므로 1-8절의 짧은 구절 안에 성도의 예정, 선택, 부르심이라는 구원의 알파부터 하나님이 성도가 마땅히 이루어야할 구원의 현재적 진행형인 도덕적 성화와 미래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날까지 우리를 보전하신다는 성도의 견인까지 그 내용이 다 들어있다. 이것은 구원이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 달렸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울의 칭의론의 아주 핵심요소이다.

13-18
13-18에서는 바울이 종말론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13절에서 볼 수 있는 '--에 관하여는'이라는 말은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익숙한 표현으로 고린도전서 7-16장에서 고린도 교회의 각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어떤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잘 쓰이는 도입문형이다.

13절에서 바울은 이런 자신이 흔히 쓰는 표현과 더불어 이중부정의 강조형으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죽은 자들을 '잠자는 자들'이라고 쓰고 있는데 죽은 자를 잠자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헬라-로마의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 잠잔다는 말의 의미가 부활의 의미를 항상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쓰이는 것처럼 바울의 신약 기독교적 맥락에서는 이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 할 때에 죽은 자가 마지막 날에 부활로 소생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13절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부분은 '소망없는 다른 이'로 번역된 말이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제하고 나머지 인류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 기독교인들이 많았지만 그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은 정말 작은 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바울이 이 작은 수와 그 나머지 전체 인류라고 말할 때에 이 작은 수에 지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로 모인 구원의 공동체에 대한 자기 정체성의 확신과 이해가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가 한번 상상을 해보면 실제로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인이 과연 얼마였겠는가? 많아야 30-40명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바울이 우리 말고 나머지 인류전체는 소망이 없다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의 기독교적 확신이 얼마나 강하고 놀라운 것이었는가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가 그 당시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고려해보면 소망없는 나머지 인류전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는 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왜냐하면 이 당시 다수의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을 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근래 로마 시대의 유대인들의 묘비문들을 분석해 보았던 한 학자의 연구 결과는 비록 유대인들 중에서 바리새인들 같은 자들은 부활에 대한 사상이 있었지만 의외로 다수의 유대인들은 죽음을 끝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죽은 자들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해를 우리가 가질 수 있는데 아마도 그들이 갖고 있는 슬픔은 단순한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그들을 잃어버린 존재로 인한 절망적인 슬픔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임박한 주 예수의 재림에 살아서 주를 영접해야 주 예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기쁨이 더 크고, 반면에 죽은 자들은 살아서 주를 영접하는 자들보다는 상당한 불이익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자기들의 부모나 친척들이 하나씩 죽어갈 때마다 슬퍼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하는 이 확신에 찬 선포는 그가 갖고 있는 기독교 구원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확신의 한 반증이다.
그래서 13-18절까지의 논점은 이 문제에 대해서 살아서 주를 맞는 자들이 죽어서 부활되는 자보다 시간적으로나 그의 구원의 기쁨에 참여하는 참여의 도에 대해서 절대로 불이익이 없으며 앞서지 못한다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14절에서 죽은 자들을 주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바울은 항상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내포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표현한다. 이 그리스도안이라는 표현의 기본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그 존재가 결정된 자로서 믿음과 세례로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주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빌립보서 123-24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바울이 자기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원하지만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산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말을 하면서 살았을 때만 아니라 죽어서도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 말은 우리가 죽음을 통해서 곧 구원의 완성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즉 우리가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안에 있음이 우리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은 주의 재림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를 말함이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죽은 이후에 자신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이 살아있을 때 그리스도안에 있음보다 더 선호할 것이라면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안에 있음이 더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감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을 통해서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을 바울이 더 원할 정도로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5절에서 바울은 이 논의를 하게 된 그 중심명제를 선포한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17절에서 종말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압도적인 신적 초월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장엄하게 임하시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여기서 주를 영접한다는 말이 '아판테시스라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의 재림을 나타내는 파루시아(15절에 강림)란 말과 항상 짝을 이루는 말이다. 그런데 헬라세계에서 이 단어가 짝으로 쓰이는 경우는 하나의 중요한 의식적 행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즉 황제가 자기가 통치하는 어떤 도시를 방문할 때에 파루시아란 말로 '방문'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로마 황제나 로마 황제를 대표하는 사람이나 혹은 유대총독이 예루살렘에 올 때는 항상 '파루시아'라고 했다. 그러면 이들을 맞이하는 도성의 지도자들은 황제나 혹은 그의 사신을 도성밖으로 나가 영접하여 도성으로 모셔오는데 이것을 바로 아판테시스라고 했다. 그런데 바울이 주의 오심과 성도들이 그를 영접함을 이 헬라어의 전문언어인 아판테시스와 파루시아로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만약 이 숙어적 사용법을 충분히 감안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재림 때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즉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음에서 부활한 성도들과 살아있는 성도들이 함께 저 공중으로 마중 나가 예수를 영접하고 이후에 다시 모시고 땅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땅 위에서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의 종말론적인 비전은 아마도 재림하시는 주를 우리 성도들이 영접해서 땅 위에서 주의 구원을 누리며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이다. 사실 이와 똑같은 비전이 계시록21장에 쓰여져 있다.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내려와서 다시 땅이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사는 모습이 계시록21장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진다고 번역된 하르파조란 단어는 일방적으로 파루시아아판테시스의 그림으로 재림의 상황을 한정시키는 것을 막고 있다. 왜냐햐면 이 단어는 다시 땅으로 돌아온다는 행동 방향보다는 구름을 타고 하나님 쪽으로 가는 행동 방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 두 개의 상징이 공존하고 있는데 그러면 어느 것이 더 옳은가? 어느 상징성에 무게를 두고 해석하냐에 따라서 종말론적인 비전이 달라진다. 공중은 성경적 해석에 의하면 악령들이 우글되는 곳이니까 거기서는 살지 않는 것이 분명하고 하나님 편에 살던지 땅 위에서 살던지 할 터인데 사실 사도 바울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늘에 올라가서 살던지 아니면 다시 갱신된 새 하늘 새 땅에 내려와 살던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게 되고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이다.

적용점1
요즘은 다수 의견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 아닌가? 물론 개별화와 자유화가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이 인간들의 사회는 다수결의 원칙이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역시 그런 사회 문화적인 풍토에 세뇌 당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이 크리스챤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적용점2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믿음과 상관없이 무서운 것이다. 불안하고 미지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계속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고 그것이 어떤 의미로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감이다. 거기서 우리는 그의 죽고 부활함으로 이루어주신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더 농도 짙게 체험하는 곳이다. 그것을 믿고 소망하며 사는 것이 우리 믿는 자에게 온전한 힘과 능력이 될 것이다.

5

1-11
종말에 대해서 1-11절은 또 하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종말의 때와 시기에 대한 것이었는데 먼저 1절에서 때라는 크로로스와 시기라고 번역된 카이로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과거에는 이것을 크로로스는 달력적 시간이라 말하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특별히 의미 있는 중요한 결정적인 기회를 말함으로 구분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것은 단순히 동의어를 겸함으로써 강조하는 수사학적 기법일 뿐이다.

2절에 자세히 안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하는가? 아마도 바울이 이들에게 종말론에 대해서 자세하게 가르쳤음을 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이 어려서 바울의 가르침을 다 알아듣지 못한 것 같다. 여기 2절에서 바울이 먼저 주요 명제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는 것을 천명한다. 앞서 4:15절에서도 바울이 먼저 명제를 천명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의하면 이 세상의 끝에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시고 종말을 고하시며 하나님이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날이 주의 날이다.
그런데 우리 신약성경적 종말론에는 하나님의 대권자인 예수가 주로 오시는 날이다. 구약의 주의 날이 예수가 주로 오심의 예언으로 재해석된다. 그 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고전15:23-25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하나님에 대항하는 사단의 세력과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 멸망시키고 아버지 하나님께 그의 왕권과 주권을 돌려드리며 하나님이 온 세상의 피조물을 평정을 하시고 다시 한번 창조주의 의와 생명의 통치 아래 있게 하셔서 온 세상의 구원의 완성의 이루실 것이다.

3절에서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하는 저희는 누구인가? 이들은 세상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데살로니가 컨텍스트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데살로니가 시민들은 친 로마적인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팍스 로마나였다. 즉 로마의 법과 질서 그리고 비교적 공정하고 능률적인 행정적 지배구조에 속국들이 충성을 약속하면 로마는 이들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해 준다고 약속했고 이것은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친 로마적 시민들은 종말을 이야기하는 기독교들을 이해할 수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바울은 해산의 고통이라는 그림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주의 날이 종말이 예기치 않을 때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밖의 사람들은 대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임할 심판과 멸망을 그들은 '결단코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상황은 바울은 낮과 밤의 그림으로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형제들에게 너희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아니니까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해도 이 세상의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나 어두움에 속한 자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임할 심판과 멸망을 예비할 수 없는 자들과 같지 않다라고 말한다. 도리어 우리들은 밤과 어두움에 속하지 않고 이미 낮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구원을 받은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주의 날이 우리들에게도 예기치 않게 온다 하여도 우리 빛의 자녀들, 낮의 아들들에게는 그 날이 무서운 때가 아니다는 것이다.

6절에서 앞의 4:13-18절의 잠잔다는 그림이 동일하게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그 의미가 4:13-18과는 다르게 쓰이고 있다. 즉 앞에서는 '잠잔다'는 의미를 죽음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잠잔다는 의미를 '무지상태에 있는 주의 재림에 대비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달리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는데 '팍스 로마나'의 환상에 젖어서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바로 잠자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세상 사람들과 달리 이미 주의 날에 속한 자들로서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을 빛을 얻은 깨어 근신하는 자들이다. 이 근신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술취하지 않고 깨어있음을 말하고 있다. 맑은 정신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촉구하는가? 우리가 주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녀들로서 밤에 속한 자들처럼 어둠의 행태로 다시 굴러 떨어지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깨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맑은 정신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어야 됨을 말하는 것이다.

7절은 근신하는 자들에 반대되는 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술 취하는 자들이고 밤에 속한 자들로서 밤에 잠자고 밤에 술취 하는데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맑은 정신을 가지고(근신하고)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바울이 강하게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을 권면하면서 믿음, 소망, 사랑으로 그들의 기독교적 실존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믿음, 소망, 사랑은 대표적으로 고전13장에서 언급되어 지는 것인데 초기 편지인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관점으로 바울 서신을 볼 필요가 있다. 즉 믿음을 지키고 사랑을 행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고 소망을 견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삶 그것이 얼마나 우리가 신중하게 싸워야 할 영적 싸움인가를 바울은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령에 힘입어 승리하는 자는 진정 사단의 유혹과 죄로부터 자유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때 '자유함'이란 우리의 순간순간의 윤리적 도덕적 판단과 선택에서 사단을 뜻을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중계명을 지킬 것에 대한 요구,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고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그 계명의 뜻에 따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하는 순간이며 그때 우리가 믿음을 견지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사탄을 이기는 것이다.

그 다음에 9-108절과 같이 할 수 있는 근본적인 동인으로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죄를 대속하시는 그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예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절에서는 또 한번의 '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가 여기서는 더 이상 그림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잠자는 것을 말한다. 즉 자나깨나 항상 자기 함께 살게 하셨다는 말이다.

11절에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운다고 할 때 이 말은 다른 말로 서로를 세워올린다는 말인데 이것은 교회공동체를 세워 올린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여기서 바울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건축해 올리듯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믿음과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든든히 세워 올려질 수 있도록 서로 권면하여 세우라는 것이다. 바울은 고후10:8 12:19 13:10등에서 스스로 고백하길 자기의 사도로서의 사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워 올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는 교회를 세워 올리는 것은 사도들이나 목사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서로 믿음을 북돋우고 사랑의 실천을 서로 권면하고 소망을 굳게 견지하도록 함으로 교회공동체를 세워 올린다고 말하고 있다.

적용점
본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주의 날의 의식하지 못하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엄청난 경고의 말씀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주의 날, 심판의 날이 도둑같이 임하는 그날 파멸과 멸망과 엄습할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그리스도인들, 낮에 속한 자들에게는 엄청난 위안과 안도를 주는 말씀이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주의 날이 언제 오든지 간에 그것 때문에 벌벌 떨 것이 아니다. 그날은 성도들에게 구원의 완성의 날이지 심판의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깨어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이 깨어있다는 것, 대비한다는 것은 주의 재림의 표징이 무엇인가 두려워 떨며 때와 시기를 계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런 태도는 신앙과 믿음이 없는 태도로 책망 받아 마땅하다."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며 말하는 것은 우리는 주의 날에 속한 자들로서 마땅히 성도의 안도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주의 날은 그 날이 언제이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구원의 날일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금 깨어나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상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의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적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절제하고 이 세상의 정신을 따라 살지 말 것이 촉구되고 있다.

적용점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항상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도와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안도하고 만족하고 기뻐하는 상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 얻은 성도는 마땅히 이런 안도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역에 있는 우리는 종말에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중보의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된다는 확신 가운데서 거하며 또한 종말에 주의 날이 언제 오든지 간에 그 날은 우리에게 제일 좋고 유리한 날에 그 날이 임할터이므로 그 날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경 쓸 것 없이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불안에 떠는 삶이 아닌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안도와 기쁨을 누리는 삶이 없으면 우리는 벌벌 떨면서 아마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이것을 누려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 믿는 사람이 더 여유가 없고 더 마음이 옹졸하고 더 가시 같아 질 수 있다. 물론 이 안도와 기쁨이 지나쳐서 방종에 흐르면 안 된다. 우리가 깨어 맑은 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주 안에서의 안도와 기쁨을 가지고 깨어 맑은 정신으로 기도하는 것, 이것이 균형을 이룰 때에 온전한 신앙의 성숙이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상호 긴장가운데 있을 때 건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