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과연 어떤 메시야인가 ?

강의 : 김 세 윤 교수

<문제 제기>

 

왜 예수님 당시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않았는가?

복음서에 보면 예수가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야로서 구약의 온갖 곳의 메시야 예언들을 명백히 보여주었는데, 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않았는가? 반면에 왜 그렇다면 소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되었는가?

오늘날까지도 같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책으로 함께 믿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하여는 왜 완전히 異見을 보이는가? 도대체 유대인들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들을 어떻게 해석하였기에 예수가 자기들 해석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거부하였는가? 반면에 예수의 제자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어떻게 이해하기에 그 예언들을 다 성취한 메시야라고 선포하게 되었는가?

과연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메시야에게 기대하는 일들을 하셨는가? 하셨다면 왜 유대인들이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반면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메시야로 기대하던 일을 하지 아니하였다면, 어떻게 베드로, 요한 등 그의 제자들은 물론 나중에 유대 신학자 바울까지도 예수가 메시야라고 선포하고 구약의 그 메시야 예언서들을 펴놓고, “보라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냐라고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까지도 설득하려고 하였는가?

이상은 기독교 신앙의 한 중요한 근본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 한번 정리해 둘 문제이다. 꽤 많이 공부한 사람들도 이 문제에 대하여 명쾌한 답을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思考와 삶에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본 론>

 

이 문제의 해결은 고린도후서 5장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편리한 것 같다. 고린도후서 5:1-21의 중심은 16,17절이다. 고린도후서 5장은 11,12절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의 맥락에 들어있다. , 그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 곧 바울의 적대자들이 고린도교회에 침투하여 바울은 진짜 사도가 아니다. 그는 사도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고 그의 福音은 틀렸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설득하자,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의심하고 그의 사도직을 무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지금 여기에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6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행해진 말이다. 바울이 말하는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에 와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예루살렘 사도들의 추천 편지(천거서)를 내어 보이면서, “보라 우리는 성지 출신 유대인들로서 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인정하고, 또 모세 율법, 즉 첫 언약의 계시를 존중하는 정당한 사도들이다. 그런데 바울은 당신들에게 추천 편지 한 장 내어놓지 못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추천 편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냐? 고린도교회 회중 여러분들이 나의 추천 편지가 아니냐? 내가 사도로서 여러분들에게 처음 와서 복음을 선포하여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여러분들은 내가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올바로 나타낸 사도됨의 증거가 아니냐? 여러분들이 나의 사도직이 옳고 나의 복음이 정당함을 증명하는 나의 추천서다. 여기에 더하여 내게 무슨 추천서가 더 필요하냐?”고 고린도후서 3장 첫머리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 편지 종이에 쓴 글을 가지고 다니는 저 사도들, 곧 거짓 사도들에 대하여 그들은 도대체가 틀려먹은 것이다. 그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첫 언약과 같은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그 언약의 계시를 받을 때에 그 언약이 돌판에 글로 쓰여졌었는데, 그러한 글로 쓰여진 계시는 두번째 언약, 즉 종말에 성령으로 심장에 쓰여질 새 언약(31:31-34)에 대한 그림자요, 그것에 대한 예언에 불과했던 것으로서 한시적이고 그 영광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이 이루어지고 이 새 언약의 복음이 선포되는 이 마당에도 그 옛것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 옛 언약에 너울이 쓰여 있다는 것이고, 옛 언약을 보는 사람의 눈에도 너울이 쓰여 있어서 옛 언약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글로 쓰인 추천장을 가지고 다니는 자들은 이 옛 언약의 성격, 즉 글로 써짐의 약점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사역을 받았고, 그 새 언약의 말씀인 복음을 받았는데, 그것은 더이상 돌판의 글로 새긴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에 대한 예언에 따라서 우리 심장에 영으로 새기는 계시라는 것이다.

이상은 고린도후서 3장의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한 것이다. 이 내용은 바울이 그의 적대자들에게(유대주의자들에게) 대항하여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이렇게 바울이 시내산에서 옛 언약의 율법의 계시와, 옛 언약의 사역을 받은 모세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새 언약의 계시를 받은 자신, 그리고 모세의 옛 언약의 사역과 자기의 새 언약의 사역을 대조하고, 우리가 옛 언약의 한시성, 상대성을 깨닫고 그것이 실제로 가리키는 새 언약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면 주의 영광을 보고, 우리 자신도 그의 영광된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월등하게 나은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바울 자신은 옛 언약에 의존하는 그의 적대자들과는 달리 복음을 왜곡하거나 술수를 쓰지 않고 올바로 선포한다고 주장한다(4:1-6 참고).

4:7-5:11에서, 또는 10절까지에서 바울은 복음의 새 언약의 사도로서 자신의 고난을 이야기 한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서 그리스도를 고스란히 나타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 따라서 사도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고난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고난받은 그리스도를 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4:10에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임 당함을 내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말하고있다. 그러니까 바울의 그 고난에서 십자가의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고난, 그 사도직을 감당함에 있어서의 고난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바울의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보고 그를 믿을 때에 영생을 얻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는 그리스도의 대표로서, 그의 전권대사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의 삶으로 나타내야 한다. 복음 선포는 그것을 말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는 그것을 삶으로도 나타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직을 바로 그렇게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11 이하에서는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그의 사도직을 부인하기 위해서 그의 과거를 문제삼은 것에 대해 답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며 그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부활을 체험하고 그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위대한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추천장을 받았고 정당한 과정을 통하여 사도가 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과거의 예수의 제자였기는커녕 예수를 저주하고 그리스도를 핍박한 자였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러니까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전에, 그리스도인 되기 전에 신명기 21:23에 근거해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은 자라고 하며 교회를 핍박했던 사실을 들추어내면서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후서 5:16,17에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내가 과거에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지 않고 그를 적대하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때는 육신적인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즉 내가 당시에 육신적인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육신적인 메시야 사상에 예수의 됨됨이나 그가 한 일을 비추어 보았을 때 예수가 메시야일 수 없다고 판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메시야도(그리스도도) 과거에 육신적인 관점에서 평가했으나 이제는 더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바울은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그 인식의 변화의 내용이 5:14에 서술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바울은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가는 순간까지 예수의 죽음이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받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는 자들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들로 잡아서 가두고 핍박하러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에 의해 부활되어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 만났다. 거기서 그는 예수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깨달음을 좀더 정확히 표현한 것이 5:21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 에 대한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히브리어 하타트의 문자적인 번역인데, 하타트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죄란 뜻이고, 또 하나는 죄에 대한 속죄의 제사의 뜻이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 뜻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죄없는 예수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하도록 해서 우리의 죄에 대한 속죄의 제사가 되게 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울의 인식의 변화의 내용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죽음은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에 대해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켜 높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에이다.

고린도전서 15:1-5에 보면, 바울이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 이미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겠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은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로부터 받아서 그것을 고린도인들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고린도인들도 그것을 받아서(받았다는 말은 믿었다는 말임) 그들이 구원을 얻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왜 자기가 원래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냐 하면, 고린도교회 일부가 이 부활을 의심하고 부인하므로 그들이 이 복음을 제대로 계속 믿고 있는지, 그 복음 안에 계속 서 있는지 의심이 생겨서 다시 한번 자기가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가 전한 복음의 내용을 3절 후반부부터 네 개의 절들로 요약을 한다.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우리 죄(죄들)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 그가 장사되었다는 것(4절 전반부), 그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그리고 그가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우리 번역에는 네 개의 절들을 똑똑 떨어지게 번역하지 않아서 조금 분명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바울은 이 네 개의 절을 복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여기에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출현의 자료들을 몇 개 덧붙인다. , 열 두 사도들에게 나타나고, 500여 형제에게 나타났다는 것(그중의 몇 명은 죽었으나 상당수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 다음에 또 하나의 씨리즈는 야고보에게 나타나고, 그리고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났다는 것,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에게도 나타났고 덧붙이고 있다. 여기까지가 복음이다. 여기까지가 절로 되어 있다.

그다음에 11절에 보면, 그러니까 나나 저희나(다른 사도들) 다 이렇게 전하고(그러니까 이 복음이 모든 사도들의 공통된 복음이라는 것), 모든 교회가 이렇게 믿고, 그래서 고린도의 너희들도 이 복음을 믿었다고 한다. 이게 모든 사도들의 공통된 복음이고 모든 교회의 공통된 신앙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가 성경대로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 “성경대로삼일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그리고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 등 성경대로란 말이 두번 나온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있는 절들은 그 앞에 있는 절들의 사실을 확인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니까 이 복음을 더 요약하면,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과 그가 성경대로 삼일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그것을 더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냐 하면, 그것이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히 사람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일으키심으로 일으켜졌다는 수동형(이런 것을 신적 수동형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행위나 이름을 주어로 삼기 꺼려서 이렇게 수동형으로 표현한다)은 이 사건의 신적 사건(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 하나님께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한 사건 - 그러니까 구원의 사건, 즉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발생했다는 말이다. 누구를 통해서? 예수를 통해서 바로 하나님이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는 사건을 감당하신(이뤄내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예수의 그리스도적(메시야적) 행위, 종말의 구원자로서의 행위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 그것이 성경(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예언한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의 성취요 종말에 주시기로 약속한 구원의 성취, 그것이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란 말이다.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후서 5:14,21에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므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었으니까 모든 사람이 그와 함께 죽은 셈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21절에 더 부연해서 그가 우리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제사를 드려 주었으므로 우리가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된 것이다. 이것이 종말의 구원의 사건인데, 이 종말의 구원의 사건을 일으키신 이가 메시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은 새로운 메시야 사상이다. 메시야는 이렇게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고 모든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우리가 제기한 문제(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라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야라 하는가?)는 유대 신학자 바울과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 사이에서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유대 신학자 사울이라 하지 않고 바울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보통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는 설교를 많이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당시 바울과 같은 헬라 세계 출신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원래 유대 이름 사울과 로마 이름 바울이 원래부터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이름이다. 그런데 유대인들 써클에서 바울이 활동할 때는 유대 이름 사울로 많이 통하고, 이방인 속에서 일할 때는 로마 이름 바울로 많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쓴 편지들은 전부 이방인들에게 헬라말로 쓴 편지들이기 때문에 사울이라고 하지 않고 다 바울이라고 쓴 것이다. 사도행전도 마찬가지이다. 사도행전에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변화(회심)9, 22, 26장에서 다루는데, 그러면 9장 처음부터 사울을 바울이라고 했는가? 그렇지 않다.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 바뀌고 있다. 그러니까 13장까지는 누가가 계속 사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바울이 주로 유대인 써클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13장은 어떤 장인가? 이른바 바울의 이방 선교여행(세계 선교여행)을 조직적으로 행한다. 그러니까 주로 이방인들 써클에서 일하므로 그때부터 바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전() 유대 신학자 바울의 눈에는 예수가 메시야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저주하고 핍박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는 어떤 분이냐 하면, “그는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어! 바로 예수가 그 메시야적 행위를 했어! 그러니까 예수가 메시야이다!” 해서 그의 사도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가 유대 신학자 바울과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 사이에서 가장 절실하게 표현된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가장 깊은 신학으로, 다시 말하면 구약에 대한 가장 깊은 해석으로 가장 널리 온 세상에 선포한 사람이 바울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제기하는 이 문제가 바울에게서 가장 예리하게 나타나며, 이 본문에서 가장 예리하게 나타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6,17에서 자기가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갈 때까지 유대 신학자로서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 사상, 즉 유대교적 메시야 사상을 육신적 관점에서의 메시야 사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메시야 사상을 갖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것에 의하면,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분이다(14,21, 그리고 그것의 좀더 정확한 표현은 고전 15:3-5까지).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사도들의 모든 공통된 복음이라 하고, 그것은 모든 구약성경(“성경대로”)의 예언의 성취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는 우리를 위하여 죽고 부활한 것으로서 그것이 메시야 됨의 내용이요, 메시야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의 계시로 새롭게 얻은 깨달음이다. 그 전에는 그는 시내산의 한시적 계시에 의거한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새 계시에 비추어 보았더니 그것은 육신적인 메시야 사상에 불과함을 깨달은 것이다.

고린도후서 5:16 이하의 바울의 진술을 계속 들어보자. “내가 그때에 육신적인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예수를 평가했기 때문에 그가 메시야 됨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저주하고 그를 메시야라고 선포하는 자들을 핍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의 메시야 사건, 구원의 사건에 의해서 나의 예수에 대한 저주의 죄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나를 새롭게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옛 것은 다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후 5:17).” 이것이 무슨 말이냐하면, 유행가의 제목처럼 과거를 묻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다메섹 도상에서의 인식의 변화로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그 구원의 덕을 입어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내가 전에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는 사실을 지금 문제삼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아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짓이다. 이뿐 아니라(바울의 논리는 18절 이하로 계속 진전됨),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에 의하여 나를 용서하시고, 원수인 나를 자기에게 화해시키시고, 의인이 되게 하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바로 그 화해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 만드셨다(18절 이하의 우리는” = 이른바 문체적 우리로서 바울이 자신을 두고 이야기 할 때 일반화하여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함. 따라서 18절 이하도 바울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임). 따라서 나에게 화해의 복음을 선포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에 의거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도록 하는 직분까지 주셨다.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를 화해시키는 화해 직분을 가진 사도, 즉 화해의 사신으로서 나를 만드셨다. 그래서 내가 온 세상에 돌아다니면서 지금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사로 여러분들을 위해 내어 주심으로 여러분들을 자신에게 화해시키려는 일을 하셨다. 이제 남은 것은 여러분들이 그 화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사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적대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잘못했다고 빌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유교 문화에서는 어린 사람이 어른에게 가서 빌어야 하고, 부자간의 갈등에서도 꼭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야 아버지의 노가 풀린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이 먼저 화해의 수단을 강구해서 우리 피조물들을 자기에게 이끄시려 하시는데, 그 자녀들이 삐딱하게 돌아서서 잘 안돌아온다. 그래서 바울이 외치고 다니는 것이다. 즉 아버지가 여러분들을 다시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지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풍부한 상속을 다 준비해 놓았으니까 이제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 바울이 설득하고 다니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교회의 핍박자였다는 그의 과거를 문제삼아 그의 사도직을 배격하고 있는 자들에게 바울이 지금 여러 단계로 답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내가 교회를 핍박한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유대교적 육신적 메시야 사상에 의한 예수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 새 메시야 사상, 올바른 메시야 사상을 얻게 되었고,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가 진정한 메시야임과 그의 대속적 죽음이 진정한 메시야적 행위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때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자기에게 화해시키고, 나를 의인이 되게 하시고, 나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 더 나아가서 내가 체험한 그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를 온 세상에 널리 선포하여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화해되도록 하는 그 위대한 직책인 사도직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지금 이렇게 자기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있다. 이 맥락에 바울의 과거 메시야 사상이 암시되어 있다. 그는 그가 다메섹에 갈 때까지 견지했던 메시야 사상, 즉 자신이 유대 신학자로서 가지고 있던 메시야 사상은 다분히 육신적 메시야 사상이라는 것이다. 즉 육신의 관점에서 본 메시야 사상이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이렇게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유대인의 메시야의 육신적 사상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당시 유대교에는 다양한 메시야 사상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된 메시야 사상, 소위 민속 메시야 사상은 다윗의 재현이었다. 신약시대의 유대 문서들은 메시야를 다윗의 씨’ ‘다윗의 순’ ‘다윗의 가지’ ‘다윗의 아들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그냥 아예 다윗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다 메시야에 대한 칭호들이다. 이 새 다윗이 와서 다윗 왕조를 재건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신약시대의 유대인들은 구약시대에 성지의 이방 민족들을 다 정복하고 다윗 왕조를 세웠듯이, 당시 로마와 같은 이방 민족들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줄 새 다윗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리고 다윗 시대와 같은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 평등, 평화 이런 것들을 이루는 메시야를 기다려 왔던 것이다. 즉 다윗 왕조를 재건할 왕조로서, 이방 민족들을 굴복시키는 군사적 영웅으로서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 이런 것들, 그러니까 구약적인 의미로 샬롬을 가져오는 메시를 기다렸던 것이다.

신약성경에도 유대인들의 그와 같은 메시야 사상의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다. 대표적으로 마가복음 12:35-37에 보면, 예수께서 유대인의 서기관들, 즉 당시 신학자들이 왜 메시야는 다윗의 아들(자손)이라고 하느냐고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도전하고 있다. 시편 110편에 다윗이 메시야에 대해서 노래하기를 야훼가 나의 주께 이르시기를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윗이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하는 마당에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지금 유대교의 유대 신학자들의 메시야 사상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순간까지도 바로 이 메시야 사상에 집착해 있었다. 아니 예수의 부활 후까지도 일부는 이 메시야 사상에 집착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사도행전 1:6에서 볼 수 있다. 거기보면 ,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저 로마 압제자들을 물리치고 할 때가 아니냐?”라고 전통적인 유대 메시야 사상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은 사무엘상 7:12-14에 보면(보통 나단의 신탁이라고 함),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서 다윗과 약속을 한다. “네 수가 다하면 네 씨를 일으켜서 네 왕위에 앉히고 내가 너의 집을 세우겠다.” 다시 말하면, 다윗 왕조를 세우겠다는 말이다. 그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자라는 의미로 나의 아들로 곧 하나님의 아들로 삼겠다라고 한 약속의 말씀을 나단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나단의 신탁이라고 한다. 이것이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이다. 다윗의 씨,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다윗의 왕조를 세우는 자, 유대 메시야 사상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나단의 신탁은 다윗 왕조를 성립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 솔로몬을 일으켜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 대신 다스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웠다. 그런데 다윗 왕조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이 나단의 신탁은 종말에 재현될 예언으로 재해석되게 된 것이다. 특히 바벨론에 의해 다윗 왕조가 완전히 멸망하고(주전 587-586) 바벨론에 포로되어 갔다가 페르샤가 세계를 제패함으로 일부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을 지을 때에 이 약속이 스룹바벨의 성전 건축을 둘러싸고 다시 일어날 것으로 갈망하는 모습을 스가랴서 같은 데서 보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야 사상이 나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정의 등 이런 샬롬을 이룩하도록 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윗의 씨, 다윗의 순, 또는 가지, 다윗의 아들, 아니 아예 다윗 또는 하나님의 아들을 메시야에 대한 칭호들로 부르면서 그런 분이 다시 오기를 고대했던 것이다.

이 메시야 사상은 또 제2의 모세의 사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신명기 18:15에 근거한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다시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셨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켰던 인물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또 광야에서 만나를 주고 물을 공급하는 등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젖고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할 국가를 이루어 살게 했다. 그는 또 하나님의 율법을 계시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켜 의롭게 살도록 했다. 즉 사회적 정의를 이루게 한 것이다. 신약시대의 유대교는 종말의 구원을 첫 구원, 즉 출애굽의 재현으로 보고 종말의 구원자 즉 메시야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 즉 제2의 모세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룰 자로 기대됐다. 그러니까 메시야는 제2의 다윗으로든지, 또는 제2의 모세로든지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 등을 가져오는 자로 이해된 것이다. 이런 샬롬을 가져오는 자가 메시야이다.

그런데 이같은 유대교적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았을 때 과연 예수가 메시야로 보였겠는가? 예수가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켰는가? 예수가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었는가? 예수는마지막 유월절(그 유월절은 어느 날인가? 첫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고 종말에 그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이 오기를 갈망하는 절기)에 십자가에 처참히 달려 죽고 말았다. 로마의 일개 지방장관인 빌라도에게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자가 어떻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인가? 그가 다윗 왕조를 재건했는가? 그가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를 가져오기는커녕 도리어 무참히 처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난만 받도록 하며 쫓기며 죽임을 당하게 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예수는 메시야일 수가 없다. 오늘날까지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메시야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를 이해할만 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가 메시야라 할 때 무슨 말인가? 유대교가 기다렸던 그 메시야의 일을 한 분이라는 말인가? 그 말이 아니다. 그런데 X-mas만 되면 목회자들이 잘못 가르치고 있다. “유대교에서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일을 다 하셨다. 예수가 무슨 그런 일을 하셨는가? 하나도 안했는데.

그런데 유대 신학자 바울은 어떻게 하루 아침에 유대교의 이 메시야 사상이 틀렸음을, 그리고 예수가 진짜 메시야임을 깨닫게 되었는가? 어떻게 진짜 메시야가 하는 일은 유대교가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고 부활하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가? 그러니까 메시야의 행위는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정의, 평화, 평등 이런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한 것이라는 전혀 새로운 인식이 어떻게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우선 예수를 메시야라고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자기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났을 때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고 높임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선포를 확인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음에 기인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핍박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선포, 그 복음 -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우리를 위해서 죽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됐다는 이 복음- 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복음으로 삼은 것이다.

이제 그렇다면 바울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 이전에 이 복음, 즉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에 대한 신앙고백을 형성했고, 바울이 이제 그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아들였는데, 그러면 이 복음을 형성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직후 이 복음을 형성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에 근거해서 예수의 메시야 사상을 주장했으며, 그것을 복음이라고 선포했으며, 그것이 성경의 예언이라고 주장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이 그의 그리스도적 행위이며, 그것이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라고 지금 주장했는데, 보는바와 같이 도대체 무슨 예언이 성취되었는가? 앞서 본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사무엘하 7장이라든지, 신명기 18장 등의 예언들에서 다윗 왕조를 재건할 군사적 영웅, 정치적 왕 메시야 사상을 도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 하며,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죽고 부활하는 것이 성경의 메시야 예언들에 대한 성취라고 할 때에 어느 성경 본문들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놀랍게도 그리스도인들의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했다고 주장하는 구약성경들 중 하나는 바로 유대교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바로 나단의 신탁이었다. 예수가 바로 이 예언을 성취한 메시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1:3-4에 써져 있다. 로마서 1:1-4에 보면, 바울은 복음을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여 하나님이 저자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복음은 사사로운 인간적 사건이 아니고 신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구원사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성경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약속하신 것의 성취, 즉 성경의 성취라는 것이요, 그다음에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분이냐 하면, 육신의 관점에서 보면 다윗의 씨(우리 성경에는 다윗의 혈통이라 함)로 낳고, 성결의 영(성령의 활동 영역에서, 또는 성령의 관점에서)으로는 부활하시어(또는 부활 때부터 -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음)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여기서 능력으로라는 말은, 인정됐다는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구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수식하는 형용사구이다.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됐다, 또는 등극했다는 말이다.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됐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이신데, 하나님 우편에 예수를 높이셨다는 말은, 대권을 위임한다는 말이다. 우편에 앉는 자가 그 왕의 대권을 대신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 창조주의 주권을 예수가 위임받아서 예수가 행사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만유의 주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한편, 3,4절은 바울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기보면 용어들이 바울이 안쓰는 용어들이 많이 나온다. 성령을 성결의 영이라 한다든지, 아주 히브리적인 표현 방법이다. 그래서 바울이 지금 자기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이 형성한 것을 자기가 받았다고 한다.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고,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어떻게 이것과 이것이 뜻이 같은가? 어떻게 보면 뜻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다. 이 복음을 자세히 보라.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났는데, 그를 부활로부터(문자 그대로는 일으켜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다는 말이다. 로마서 1:3,4을 보면 구약의 어떤 성경이 생각나는가? 바로 나단의 신탁이다. 하나님께서 나단의 신탁이 뭐한다고 약속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 전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무엇을 보았냐면, 바로 구약의 나단의 신탁의 성취를 본 것이다.

복음을 로마서 1:3,4에서 다시 요약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인데, 그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분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둘째 성령의 관점에서(성령의 활동 영역에서) 본다면 죽은 자들에게서 일으키심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메시야)로 인정(선포)되신 분이다. 일으켜져서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 즉 주권을 행사하는 만유의 주로 등극시켰다는 것이다.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였지만, 그는 육신적으로 다윗의 씨로서 아직 권세를 충분히 휘두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로 그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 다시 말하면 만유의 주로 등극한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3,4의 신앙고백인데,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아주 초기의 신앙고백으로서 원래 아람말로 되어 있던 것을 문자적 헬라어로 옮겨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 이 신앙고백을 바울은 복음이라 하고, 이 복음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하고 하는데(1:2), 무슨 예언의 성취란 말인가? 예루살렘 사도들과 바울은 예수가 바로 유대교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나단의 신탁을 그대로 성취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단의 신탁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겠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건은 무엇인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예루살렘 사도들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서 자기의 우편에 등극케 하여 자기의 아들로 확증하셨으며, 만유의 주로 부임하게 하셨다고. 바울은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로마서 1:2-4까지에서 이 복음이 내용으로 삼고 있는 예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고 부활이 나단의 신탁을 고스란히 성취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우리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유대인들은 나단의 신탁에서 유래하는 메시야 사상에 비추어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나단의 신탁을 다 성취한 메시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문제를 해결해야 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문제의 진정한 의미, 즉 이 문제가 얼마나 예리하고 심각한 문제인가에 대한 분석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바울 서신들이나 신약의 다른 책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를 살핌으로서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으나, 요한복음에서 예를 드는 것이 좋을 것같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유월절 무렵에 (유월절은 첫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고 종말의 출애굽의 재현을 갈망하는 그런 절기임) 예수께서 광야에서 5,000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셨다. 모세가 출애굽 때 이스라엘에게 기적적으로 만나를 먹임과 같이 예수가 그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고 그와 똑같은 제2의 출애굽이 있기를 갈망하는 유월절 기간에 기적적으로 만나를 먹인 것이다. 그것을 체험한 군중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모세와 같은 구원을 가져올 분임을 나타내는 표적이라고.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메시야 사상을 예수에게 투사해서 예수가 바로 그런 메시야가 되리라는 표적으로 본 것이다. 고로 5,000명의 군중들은 ! 신명기 18:15에 약속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났다. 진짜 메시야가 왔구나! 이 예수가 진짜 제2의 출애굽을 이루겠구나! 로마 압박자들을 몰아내고 제2의 출애굽의 구원, 자유와 풍요와 정의의 샬롬을 이룰 구원자가 왔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메시야 사상을 예수에게 완전히 투사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야로 추대하고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옳다하고 거기에 부응했는가? 아니다. 예수는 무리들로부터 떠났다. 유대인들은 밤새 예수를 뒤쫓아다녔다. 그들의 그 메시야적 갈망, 그들에게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정의를 가져오는 메시야적 갈망이 여기에 절실히 나타나 있다. 그들에게 예수는 말했다. “광야에서 먹은 그 만나가 구원이 아니었다. 그것을 먹은 너희 선조들은 다 죽었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지금 나에게 모세가 가져다 준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를 이루어달라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진정한 구원이 아니다. 너희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은 배고프게 되는 것이고, 결국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조금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되지 못한다. 내가 광야에서 5,000명을 먹인 사건은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시간과 공간 내에서 모세가 이룬 제2의 출애굽을 이루겠다는 표적이 아니고, 하늘의 양식을 가져오는, 하늘의 영생을 가능케 하는 양식을 가져다 줄 것임에 대한 표적이다라고 말했다.

요한복음의 구조는 크게 두 부분(두 책)으로 되어 있다. 2 - 12장까지는 첫번째 책으로 이른바 표적들의 책이고, 13 - 20장까지는 이른바 수난과 영광의 책이다. 그런데 이 표적들의 책의 구조는 7개의 표적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신다. 그것은 이 아랫 세상에서의 물리적인 사건으로서 윗 세상의 하늘의 진리를 표적하기 위한 것인데, 이 아랫 세상에 사는 유대인들은 그것을 물리적으로, 육신적으로만 해석을 했다. 그러니까 항상 오해가 발생을 하게 된다. 이 이적이 진정으로 표적하는 바를 잘못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예수가 거기에 대해서 긴 강의를 한다. 2장의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은 유대교의 대표인 니고데모에 대항해서 예수가 3장에 긴 강해를 한 것과 관계가 있다. 또 하나 유대교의 대표인 사마리아 여인에 대항해서 또 긴 강해를 한다. 그리고 5장에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에 대해 그 표적성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유대인들이 시비하자 또 예수가 길게 강해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6장에서 5,000명을 먹였다. 그것에 대한 표적성을 오해하고 무리들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 2의 메시야가 나타나서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그렇게 해석한 것에 대해 예수는 그게 오해이고 진짜 그게 표적하는 바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표적의 책은 바로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52의 사건은 무엇을 표징하는가? 이 떡()은 무엇인가? 생명을 주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이 이적은 예수가 생명을 주는 자임을 표적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석했는가? 그들은 예수가 세상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는 곧 세상적인 자유, 풍요, 정의, 그러니까 이 세상 내에서의 풍성한 삶을 가져다 주는 자임을 표적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예수는 그런 것들은 이 세상의 내재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구원, 또는 진정한 삶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내재적인 것들은 한계된 것들로서(한계된 것들은 결국 결핍적인 것을 말함) 죽음을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핍에서는 무엇이 나오는가? 고난이 나온다. 고난은 죽음의 증상인 것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므리바에서 물을 마신 자들 곧 첫 출애굽의 이른바 구원을 받았던 자들도 다 죽은 것이라고 예수는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바라는 그런 것은 절대적인 구원이 아니다. 그런 것을 가져다 주는 자가 메시야일 수가 없다. 메시야는 절대적인 의미의 종말의 구원을 가져다 주는 자인데, 이 세상을 초월하는 영원에서 오는, 무한에서 오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늘에서 오는(초월해서 온다는 말) 무한한 삶(영생)을 가져다 주는 분이 진정한 메시야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기가 바로 그것을 가져다 주는 메시야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떻게 가져다 주느냐 하면, 예수의 설명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내가 바로 그 영생을 주는 떡()이다. 내가 바로 하늘에서 온 그 떡()이다.” 예수는 그것을 좀더 부연하여 아주 극적으로 선언한다. 6:53누구든지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즉 나의 살과 피가 바로 영생을 주는 하늘로부터 온 떡이다.” 이 말씀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의 만찬의 요한복음판이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다음날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의 의미를 극으로 표현했다. 이 최후의 만찬은 34중의 상징성을 가진 드라마이다. 이것은 출애굽의 구원을 상징하고 종말의 구원을 고대하는 유월절에 일어났다. 그 재료는 무엇인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다. 마시는 것은 무엇을 가져다 주는 것인가? 생명을 주는 것이다. 재료의 선택에 있어서 빨간 색깔의 포도주, 이런 것들은 또 예수 자신의 처참한 죽음으로서 그 스스로 우리에게 생명을 내줌을 의미한다. 이는 은혜적인 것이다. 이 종말의 구원의 생명이라는 것이 인간이 스스로 얻는게 아니고, 거꾸로 선물로, 은혜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몇 중의 상징성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다 해설의 말씀을 덧붙였다. 이른바 떡의 말씀, 잔의 말씀이다. 잔의 말씀을 보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다. 그러니까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바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이사야 53:10-12을 인용한 것이다. 즉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여기 예언된 주의 종의 자기 목숨을, 배역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대속의 제사로 내어 흘려버림(흘려쏟음)으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패역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한번 의롭게 하여 그들을 다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는 사건이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의 피는 출애굽기 24:8에서 온 말인데,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시내 광야에 모아놓고 모세가 언약의 제사를 드리고, 제물의 피를 그 회중에게 뿌리며 언약의 피라고 했다. 그 언약의 피에 힘입어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그 언약의 제사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립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언약을 세운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는 말이다. “내가 너희 하나님이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 일단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여 자기 백성들 삼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 그것이 언약을 세우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심, 곧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구원하고, 복주는 하나님 노릇 해주시기로 약속하는 것, 즉 언약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언약을 이스라엘 쪽에서 안지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의지하고 순종해야 사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레미야 31:31 이하에 보면, 새 언약을 세운다는 말씀이 있다. 옛 언약은 아마 돌판에 새겨서 사람들이 돌처럼 굳어져 잘 순종하지 않으니까, 새 언약을 마음(심장), 그 부드러운 살에 새겨서 심장에서부터, 곧 동기의 발원지에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새 언약을 세운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에게 내일 다가오는 죽음은 옛 시내 언약에 상응하는, 어쩌면 그 언약을 대치하는, 예레미야서에 예언된 새 언약을 세우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 41:6, 49:8에도 주의 종을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위한 새 언약으로 바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예언들을 예수가 다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대속의 제사요,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라는 것이다. 대속의 제사로써 초래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의롭게 됨, 즉 그들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함이다. 새 언약의 제사로 초래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새 백성의 창조, 그러니까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대속의 제사와 새 언약의 제사로서, 다시 말하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처럼 자기의 죽음을 한편의 드라마로 설명했다.

이와같은 예수의 죽음은 뭐냐하면, 그가 하나님 나라 선포로 약속한 구원의 성취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해서 하나님 나라가 왜 복음이고, 그 복음의 선포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 선포에서 예수가 무엇을 의도했는가? 성경대로 예수는 인간을 사단의 나라에서(사단의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상황 속에 있는 것으로 봄) 건지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단이 아담에게 와서 네가 하나님 같이 되라고 했다. 그래서 아담이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 사단의 통치(순종) 아래 떨어진 것이다. 사단의 말을 듣고 스스로에게 하나님 노릇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매여 사는 자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이 필요없고 내가 내 위에 하나님 노릇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 자기의 내재의 자원이 무한한 줄로 안 것이다. 그 내재의 자원으로 자기의 삶의 의미를 확보하고 자기의 삶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내재의 자원으로 자기의 삶을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이 불필요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 안에 닫아버린 것이다. 그 순간에 아담은 결국 자기의 내재의 자원 속에 갇힌 것이다. 자기의 내재의 자원 속에 제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아담의 자원이라는 것은 결국 어떤 것이냐 하면, 제한된 것이다. 즉 피조물성, 제한성(결핍성)을 말한다. 그래서 지혜가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영원 속에 있지 않은 시간 속의 존재로, 부소부재함의 자유가 있는게 아니고 장소적으로 제약되는 부자유한 존재가 된 것이다. 거기서 무엇이 나오는가? 고난들이 나온다. 지혜가 부족해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하고, 능력이 부족해서 온갖 어려움 속에 빠지고, 문제 속에 빠지고, 사랑이 부족해서 온갖 갈등 속에 빠지고, 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늙고, 쇄약해지고, 병들고, 죽고, 장소적인 제약 때문에 부소부재함의 자유를 못누리고, 제약 즉 모든 고난들이 온 것이다. 이 고난들이 무엇인가? 죽음의 증상들이다. 이같은 아담의 상태는 샘의 근원, 삶의 근원이요 생명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뽑힌 나무로 보면 좋다. 뿌리뽑힌 나무, 창조주로부터 분리된 이 아담의 실존은 이렇게 삶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뽑힌 나무와 같다. 따라서 수분과 양분,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한 순간부터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것이다. 죽음병에 든 것이다. 그 죽음병의 증상은 잎이 마르고 가지가 시드는 것처럼, 인간에게 모든 고난이 따라오게 되었다. 아담은(인간은) 살았으나 사실상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살았다고도 하고 죽었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사단이 아담에게 속임수를 쓴 것이다. 사단은 속임수를 쓰는 자이다. “네가 네 하나님이 되면 좋다고 했다. 아담이 속임수에 빠져서 사단이 하라고 하는대로 하니까 그것이 죄다. 하나님에 대한 자기 주장이다. 그렇다면 사단이 무엇으로 월급(품삯)을 주는가? 죽음으로 준다. 로마서 6:23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한다. ‘은 노예나 용병에게 주는 월급이다. 이처럼 사단이 우리를 노예로, 용병으로 부리면서 그 댓가로 죄를 짓도록 하고,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품삯을 준다. 바로 우리 인생이 이런 것이다.

예수는 우리 인생의 이런 상태를 가장 감동적인 비유인 탕자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그 아들이 자기 분깃의 그 커다란 무한함에 놀라가지고 그것으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훨씬 더 멋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분깃을 가지고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리고 멀리 가버린 것이다. 인간도 이처럼 자기의 내재의 자원에 놀란다.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에게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고 하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에게는 무한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탕자는 자기의 분깃을 가지고 나갔으나 곧 그것의 제한성, 결핍성을 느낀 나머지 나중에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까지 먹었다. 이런 탕자에게 있어서의 구원은 무엇인가?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고 아버지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는 자가 되고, 아버지의 거대한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바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의와 생명으로의 통치를 무엇으로 비유했느냐 하면, 잔치로 비유했다. 그 중에서 결혼 잔치로 비유했다. 결혼 잔치에 초대했는데 유대인들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잔치의 주인이 종들을 큰 길, 골목길로 보내 심지어 불구자까지 다 데려오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 우리까지 다 들어가게 된 것이다. 왜 잔치의 비유로 말씀하는가? 잔치의 상징성은 무엇인가? 풍요, 배부름, 만족이다. 배부르면 기쁨, 사랑이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실존은 무엇인가? 결핍, 거기에서 나오는 욕구불만(자원의 결핍으로 우리의 욕구를 채울 수 없음)이다. 그래서 기쁨 대신에 슬픔과 아픔 뿐이다. 그래서 그 제한된 자원을 조금 더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여서 인간 사회는 생존경쟁하는,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노릇 하는, 약육강식 하고, 적자생존하는 처절한 싸움판이 된 것이다. 이게 인생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이라는 말로 설명하셨다. 즉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무한함을 상속받으라는 것으로 말씀하셧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아버지의 부요한 잔치에 참여하고, 또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어서 아버지의 상속받음, 다시 말하면 피조물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초월성, 무한성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무한과 초월의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영생이라고 하셨다. 이런 삶은 내용적으로 신적 삶인 것이다. 반대로, 인간의 제한된 자원으로 사는 것은 인간적 삶이다. 그것은 죽음병에 든 삶이다. 죽음의 증상들로 누더기진 삶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신적 삶, 무한에 참여하는 삶(무한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고난이 없다. 왜냐하면 결핍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삶이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永生이요 生命이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니까 회개하여 사단의 나라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부르시고(초대하심), 약속하셨다(초대장에 잔치가 끝나면 엄청난 피로연이 열린다고 약속되어 있음).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이러한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즉 자기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 구원을 예수는 말로만 나타낸 것이 아니라, 시위(demonstration)하셨다. 곧 귀신을 내어쫓고, 병자를 고치고, 죄인을 고쳐서 온전케 하고, 삭개오를 회개시키고....... 아주 넓은 의미로 치유의 사역을 하셨다. 혹자는 치유를 신체적으로 고침받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것도 포함되고, 그러나 인생의 모든 면에서의 치유, 예를 들면 도덕적인 그릇됨의 고침, 인간 관계에서의 그릇됨의 고침, 죄인들을 회개시켜 온전케 함, 하나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게 함<대표적으로 삭개오의 경우 -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회개했을 때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고 하심. 마치 문둥병자에게 38년 된 병자에게 구원이 임하듯이 삭개오에게 구원이 임함. 하나님 나라의 구원(치유)이 그에게는 그렇게 나타남. 즉 그가 착취한 사람들에게까지 샬롬이 이루어지는 형태로, 평화가 이루어지고, 갈등 관계가 자유의 관계로(백성들은 삭개오에게 공포의 관계요, 삭개오는 백성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공포의 관계로), 그런데 거기에 샬롬이, 자유가 이루어진 것임>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인생의 모든 측면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말이다. 꼭 무슨 신체적인 것만도 아니고, 신체적인 것과 관계가 없는 무슨 영혼 구원만도 아니고, 우리 인생의 모든 면을 다 포괄한 구원이다. 그러니까 그 구원은 신체적인 건강으로도 나타나고, 관계에서의 올바름으로도 나타나고, 빈곤에서의 해방으로도 나타나고, 자유의 증진으로, 정의의 증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꾸 이원론적 생각, 즉 영혼과 육신을 구분하는 존재론적 이원론과,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종말론적 이원론의 그릇된 인식에서 구원을 내세에 우리 영혼이 천당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이 완전히 관념화되고 추상화되어서 구원은 미래로 연기되어 버리고, 지금 여기서는 구원이 없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그 내세에서의 영혼 구원이라는 아주 관념화되고 추상화된 뭐라고 그릴 수 없는 그것을 그냥 기다리는 삶인가? 그럼 여기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없는 것인가?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자신을 통해서 그 힘을 발휘한다고 했다(예를 들면, 삭개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고, 문둥병자에게 구원이 나타남 등).

그런데 지금도 많은 엉터리 구원론자들에 의하면, 구원은 내세에 영혼이 구원받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수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치하는 내세가 지금 사단의 통치하는 이 세대에 침투했다고(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영혼의 국면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신체의 국면에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체적 건강 회복이 안수기도에 의해서만도 아니고, 의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한 토막의 음악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정신이 온전해지고, 한 토막의 그림으로도 나타날 수도 있고, 좋은 설교를 듣고, 또 보다 많은 자유의 확대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삭개오를 회개시켜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선언과, 야이로의 딸을 일으킨 사건과 어떤 것이 더 큰 구원의 사건이겠는가? 오늘날로 말하면 안수해서 암 환자를 낫게 한 사건과 죄인 하나를 회개시킨 것과 어떤 것이 더 큰 생명의 역사인가? 죄인을 회개시킨 것이 더 큰 성령의 역사이다. 또 대학에 실패한 학생에게 복음을 가르쳐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고, 삶의 새로운 용기를 얻도록 하면, 암 환자 고치는 것과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 살리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암 환자 고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복음을 통해 죽을 생명을 살리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가? 죽을 사람 살리는 것이 복음의 생명의 역사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로 그의 죽음은 약속한 구원을 성취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시켜 주겠다. 하나님의 상속을 받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그의 죽음은 약속을 성취한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이다. 그러니까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의 죽음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약속과 성취의 관계이다.

, 그러면 무엇이 복음이며, 무엇이 기쁜 소식이며, 무엇이 구원의 사건인가? 물론 그리스도의 삶과 하나님 나라의 선포, 그의 치유 행위 등 그의 죽음과 부활 전체가 구원의 사건으로서 그 전체를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사건, 메시야의 사건, 곧 종말의 구원자로서의 구원의 사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 엄밀히 말해서 그 초점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맞춰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편에 서 있는 그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가르쳤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여 우리를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죄 문제를 해결했다는데 중요성을 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피조물이 다시 한번 창조주에게 연합(연결)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무로 말하면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에게 뿌리를 박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죽음의 사건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선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되풀이 하지 않고, 무엇에 집중되냐 하면 십자가의 죽음의 복음, 그리스도의 죽음의 복음에 집중된다.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우리의 구원을 약속했다는 것이 아니고(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여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사와 새 언약의 제사로 스스로 바쳐서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께 다시 연결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이제 우리의 피조물적인 제한성 속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의 무한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우리의 피조물적인 제한성(내재성)을 초월하는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 구원자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5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고 부활했다는 것, 그것이 복음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에 구원자로서의 행위요, 메시야로서의 행위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이것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터득한, 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터득한 복음이다. 그 복음에는 유대교 메시야 사상과는 다른 새로운 메시야 사상이 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원래의 문제는 어떻게 설정되는가? 우리는 앞에서 초대 교회(베드로, 야고보, 요한으로 대표되는)와 바울의 새로운 메시야 사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새롭게 주어진 논리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그것이 유대 메시야 사상과 어떻게 다른지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과 신약의 사도들의 기독교적 메시야 사상 중 어떤 것이 더 옳은가 하는 문제가 설정된다. 이런 것을 내용 비판이라고 한다. 유대교는 지금도 자기들의 메시야 사상이 옳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은 유대인들의 그 메시야 사상이 옳지 않다고 보고, 새로운 언약의 계시의 메시야 사상이 옳다고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메시야 사상이 옳은지 살펴보자. 예수가 약속하고 이룬 구원과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구원 중 어느 것이 과연 진정한 구원인가? 이 세상 안에 피조 세계의 한계 내에서 유대인들은 자유와 정의와 풍요, 평화 등 이런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런 구원이 있을 수 있는지 살펴보자. 이 세상 안에, 피조 세계의 한계 내에 절대적인 자유, 풍요, 정의가 있을 수 있는가? 물론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절대적은 아닐지라도 최상의 자유, 최상의 정의, 최상의 풍요가 있는 곳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미국보다 더 자유를 많이 누리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러나 마약과 권총으로 인한 범죄들로 인해서 공포와 속박을 더 느끼고 있지 않은가? 또 미국보다 더 풍요로운 나라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맨하탄 마천루 밑에 어슬렁거리는 무주택자들의 바참한 빈곤과, 물질적 풍요 속에 더해 가는 인간성의 황폐를 생각해보라.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분명히 우리의 삶을 증진시킨 면이 있다. 농업혁명은 우리의 보리고개를 해결해서 우리의 삶을 증진시켰다. 또 산업혁명은 소비재의 양산으로 우리의 삶을 매우 풍요롭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에 빠져서 인간성의 황폐를 가져왔고, 쾌락주의 속에서 인간성의 황폐를 가져왔고, 인간의 욕심을 극대화시켜서 인간과의 관계를 더 심한 갈등의 구조로 만들었고, 그래서 더 많은 고난을 가져왔고, 최근에 더 심각해진 오염의 문제는 정말로 죽음을 가져왔다. 또 교통 통신의 발달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적인 제약을 극복하고 얼마나 많은 자유를 가져다 주었는가? 그러나 전화 공해를 당해본 일이 있지 않은가? 그뿐 아니라, 전 세계를 연결시키는 통신 수단의 발달은 지리적, 시간적 제약을 극복하게 했다. 첨단 통신의 발달은 안방에까지 침투해 부부 사이의 대화마져 엿듣게 됨으로 말할 자유마져 빼앗기는 시대가 되었다. 머지 않아 머리 속에 생각하는 것까지 알아내는 기계가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내 생각을 사용할 자유도 박탈당하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세상 내의 자원으로 얻는 가능성은 일면 우리 삶을 증진시키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런 것은 항상 죽음의 이면을 동반하고 온다. 인간성의 황폐화로, 오염의 형태로, 갈등을 증진시키는 형태로, 자유의 박탈 형태 등으로 항상 죽음을 동반하고 온다. 죽음의 이면이 없는 순수한 삶 덩어리만은 이 내재 세계의 현실이 실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이 내재 세계에서의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죽음의 이면(그림자)이 없는 삶은 없다. 삶이 확대되는 곳에 그만큰 죽음이 확대된다. 한 세대가 마치 문명이 인간의 그 자원의 적절한 활용으로 인간의 지혜(관찰할 수 있는 지혜, 추론할 수 있는 지혜, 과학적 탐구로 얻어지는 지혜)의 기술적 응용으로 얻어지는 생산 수단의 발달로 일방적으로 삶이 확대되는 줄 알고 좇아가다 보면 죽음이 그마큼 확대된다. 그래서 문명 사회에 항상 무슨 현상이 벌어지냐면, “이 문명 다 때려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주의 운동이 벌어진다. 그것은 주기적으로 벌어진다. 최근에 가장 크게 벌어진 그같은 운동이 60년대 후반, 그리고 70년대에 일어난 히피 운동이다. 한 세대의 소비사회의 그것이 우리의 삶을 확대하는 줄 알고 좇아가다 보니까 죽음이 확대된 것이다. 그 첨단과학의 결과가 무기로 나타나서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가고, 핵무기의 발달로 온 인류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고, 자연의 오염, 인간성의 황폐 등...... 그러니까 이런 것 다 때려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면 거기는 무슨 구원이 있는가?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 보리고개를 당하면 그것은 죽음이지 무슨 구원이 되는가? 그러니까 결국 인간의 내재 속에서는 빼도박도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든, 문명을 하든 삶과 죽음의 갈등이 있다. 다만 삶과 죽음의 모습이 좀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죽음이 없는 삶이 아니라, 항상 삶과 죽음이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너희들이 원하는 내재에서의 구원이란 항상 죽음을 동반한 삶이란 것이다. 그 가능성 밖에는 없다. 그것은 구원이 될 수 없다. 진정한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연결로 말미암은 그 창조주의 초월성의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예로 들어보자.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우물을 가리키면서 그의 조상이 준 그 우물로 그의 후손들인 자기들이 생명을 얻었다고 자랑한다. 여기서 우물은 시골의 조그만 샘이 아니고, 사막의 오아시스를 말한다. 이 오아시스는 한 부족의 삶을 지탱해 온 것이다. 그 오아시스에서 마실 물도 얻지만, 가축이 살게 되고, 농사가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야곱이 준 그 우물은 이처럼 야곱의 후손들에게 생명을 준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 속에서의 삶의 풍성함을 허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물을 먹으면 다시 목마르다고 하셨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자들이 다 죽었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예수는 말씀하기를, 그 물을 먹으면 다시 목마르지만, 자신이 주는 물 생수는 진정한 생명 곧 영생이 샘솟게 하는 물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로써 예수는 그가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그의 영 곧 성령,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영을 받아서 영생을 얻게 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의 우물은 종말에 메시야가 가져다 줄 생수에 대한 그림자요 모조품이었던 것이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종말에 메시야가 가져올 그 하늘의 진정한 양식의 그림자요 모조품이었다.그것은 메시야 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종말에 이 내재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자유, 좀더 많은 풍요, 좀더 많은 정의 등을 가져오는 표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절대적 자유, 절대적 풍요, 절대적 정의를 가져오리라는 표적이었다.

그렇다면 나단의 신탁에 의거하여 다윗 왕조를 재건하리라고 본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누구인가? 하나님이시다. “내가 너희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그 하나님의 통치를 인간적으로 이 세상의 내재 속에서 대행하는 자가 다윗 계열의 왕이었다. 그러므로 다윗 왕조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이며, 모조품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표현(representation)이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문자적 재현도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고, 다윗 왕조의 문자적 재건도 궁극적인 의미의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더러 다윗 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는 메시야가 되라고 한데 반해, 예수는 모조품이 가리키는 그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가져오는 메시야가 되려고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더러 다윗 같이, 또한 모세 같이 이 세상적으로 더 많은 정치적 자유와 더 많은 경제적 풍요와 더 많은 사회적 정의를 가져다 주는 메시야가 되라고 요구한 것이고, 이에 반해 예수는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생명, 완전한 자유와 정의, 무한한 풍요, 영원 등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가져다 주는 메시야가 되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교적 메시야가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모조품 밖에 제공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 내재 속에서의 실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모조품, 그 그림자는 절대적으로 구원이 되지 못한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것의 모조품인 다윗 왕조를 재건한 것이 아니고, 다윗 왕조가 그려낼려고 했던 하나님의 통치의 그 실체 바로 그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고, 진짜 하나님의 통치의 절대적 자유, 절대적 풍요, 절대적 정의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다윗 왕조의 건설을 말하는 나단의 신탁이나,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약속한 신명기 18:15 등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은 사실 이 세상의 그림자, 또는 모조품을 그림으로써(illustration) 우리에게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 즉 다윗 왕조 저편의 다윗 왕조가 반영할려고 한, 다윗 왕조가 불완전하게 이 세상에서 그려볼려고 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 하나님 나라의 그 절대적 구원 자체에 대한 예언들이었다.

그러니까 예수가 메시야이다라는 기독교적 주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유대인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이 세상 내에서의 실재로 해석함으로써, 메시야는 제2의 출애굽이나 다윗 왕조의 재건을 통하여 정치적 해방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야곱의 우물을 회복해 준다든가, 광야의 만나와 물을 회복해 주는 등 경제적 풍요를 가져온다는 것인데, 그런 것들을 이 세상 내에서의 실재들로서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자유, 좀더 많은 풍요, 좀더 많은 정의는 될지 모르나, 절대적인 구원은 되지 못한다.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들이 말하는 종말의 구원은 이 세상 내에서의 좀더 자유롭고, 좀더 풍요롭고, 좀더 정의로운 상태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그들은 사실 이 세상의 실재들을 가지고 하늘의 완전하 것들, 절대적인 것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바로 그런 하늘의 절대적인 것들 곧 다윗 왕조가 그려낼려고 했던 하나님의 통치 자체와 그 통치의 구원 자체를 가져온 메시야이다. 예수가 나단의 신탁이나 신명기 18:15 등의 예언들을 진짜로 성취한 분이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로 그 예언들에 의거해 예수가 메시야적 행위들을 하지 않았다고 보고 그의 메시야 됨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 그 예언들의 진정한 의미, 성령의 조명으로 터득하게 되는 그 예언들의 정신을 터득하지 못하고 그들의 문자에만 집착해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고린도후서 3:6에 말하고 있다. 시내산에서 모세의 율법의 계시를 절대화하여 그것에 문자적으로만 매달림으로써 그것이 정작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종말론적 성취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은 그 시내 언약에 너울이 있고, 그것을 읽는 유대인들의 눈에도 너울이 있어서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답답해 하고 있다.

유대 신학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깨달은 것이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계시로 이것을 깨달았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부활된 자로 그들에게 계시되기 전에는 그들도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구약의 올바른 해석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그 순간까지 메시야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예수께 대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는가?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부활되어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한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다윗 왕조의 재건을 고대하던 그들의 문자적 메시야 사상을 배격하고, 예수가 다윗 왕조가 하나의 그림으로써 가리키는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를 선포와 죽음으로써 실현한 메시야라고 주장한 것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고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 계시에 비추어서 구약의 계시를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의 유대교적 해석이 외형적 또는 육신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바울이 고린도후서 5:16에 육신적인 관점이라고 함), 예수가 그것의 본질적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고 성취하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예수가 하신 일, 즉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치유로서 시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초대하고, 하나님 자신의 몸과 피를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십자가에 내어 주시어 그들을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만들어 그들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게 한 것, 이것이 구약의 예언들이 진정으로 의도한 메시야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다윗 왕조가 이 세상에서 그려내도록 되어 있었던, 그러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말았던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메시야였다. 그리고 그의 일체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구원을 가져오는 사건이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근본적으로 그런 구원의 약속을 한 사건이고, 그의 죽음은 그 약속을 성취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와 유대교의 논쟁은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곧 누가 구약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느냐? 기독교가 올바로 하느냐, 유대교가 올바로 하느냐?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정할 수도 있다. 유대교적 메시야 사상이 옳은가? 아니면 신약에 사도들이 선포한 메시야 사상이 옳은가? 또한 유대교가 말하는 구원이 진정한 구원인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진정한 구원인가? 어느 것이 구약성경의 진정한 의도를 더 잘 반영하고 있는가? 이 세상 속에서의 좀더 많은 자유와 좀더 많은 풍요와 좀더 많은 정의를 가져다 준 자가 진정한 우리의 구원자인가, 아니면 창조적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우리 피조물들에게 덧입혀 주는 분이 진정한 구원자인가? 여기에 갈림길이 있다. 이런 갈림길에 서서 곰곰히 생각할수록 우리는 신약성경에 선포하는 복음의 진리들에 대한 확신이 더 커지게 된다. 유대교적 육신적 메시야 사상뿐 아니라, 모든 육신적 메시야 사상들, 곧 공산주의, 자본주의, 인본주의 문명 낙관론 등도 하나의 메시야 사상들이다. 이런 육신적, 즉 내재의 세상 속에서 자유와 정의와 풍요 등 우리 삶을 온전케 할 수 있다는 그 약속 모두가 메시야 사상들이다. 그것들이 사람들이 고대하는 세상 내에서의 진정한 자유, 정의, 풍요, 평화, 만족 등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앞에서 보았듯이, 절대 가져다 주지 못한다. 어느 면으로는 그것이 가져다 주는 것도 같다. 공산주의는 이제 파산되었으나, 한때 사람들을 속였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계속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계속되는 생산 수단의 발달로, 계속되는 통신 수단의 발달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에게 자유와 풍요, 정의와 평화를 다 확보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항상 그것은 죽음을 동반하고 온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실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인본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 어떻게 인간의 소외와 갈등을 초월하는 자기 주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맘몬 또는 물질주의에 빠져 있는 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여 공동체적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적 행위에 근거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올바로 연합되어서 그의 무한의 사랑과 부요함에 참여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되고, 물질적 가치들을 상대화 할 수 있게 되어 비로서 자기를 주장하는 대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비로서 공동체적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풍요가 확대되는 것이다.

예수의 사도들은 바로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서 구원을 약속하고, 그의 죽음과 부활로 서 그와 같은 것을 이루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론적 이원론, 곧 영혼과 육신을 구분해서, 또는 종말론적 이원론과 연결시켜서(, 금세와 내세를 구분해서), 구원이란 영혼이 내세(천당)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구원을 우리 인간의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의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육신, 영혼 가릴 것 없이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을 말한다.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도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실존을 사고의 편에서 어떻게 분석하던, 육신과 영혼을 갈라서 생각하던, 외톨배기로 생각하던, 독립적 개체로 생각하던, 사회적 존재로 생각하던, 갈등 관계에 있는 존재로 생각하던 모든 영역에서의 구원이다.

그다음 예수와 사도들은 뭐라고 말하냐면, 바로 오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이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해서 죄와 죽음으로 다스리는 금세(今世) 속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종말(내세, 오는 세상)이 지금 벌써 여기에 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그 구원의 힘을 발휘하면서 온 것이다. 그 구원의 힘이 어떻게 나타나냐 하면,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온전케 함으로 나타난다. 곧 신체적 건강으로, 경제적 빈곤에서의 해방으로, 사회적 갈등의 극복 등 모든 면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는 힘으로 지금 여기에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사단을 결정적으로 이겼다. 그러나 사단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단은 등뼈가 부러졌지만, 아직도 사지에 힘이 남아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죄를 저지르게 하려고 사주하고, 죄악을 저지르면 죽음으로 그 삯을 준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여기에 있는가 하면, 사단의 나라의 죽음도 여기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단을 자기 발등상에 두시고, 사단을 완전히 무력화했을 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이 두 사이에 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사단을 주로 고백하면(사단의 말을 따르면) 죄와 죽음을 맛보는 것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말을 따르면 구원을 맛보는 것이다. 지금 현재 여기서 체험하는 것이다. 지금 그 구원이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통치 속으로 이미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사단이 우리에게 와서 자꾸 속삭이는 것이다. 네 이익을 위해서 살라고. “저놈의 것을 조금 더 착취하라. 저 원수를 갚으라. 그러나 그렇게 하면 죽음이 자꾸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반면, 그순간 예수는 나에게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용서하라, 이웃을 섬겨라고 하신다. 예수의 말을 들으면 샬롬이 확대된다. 자유가 그만큼 확대된다. 건강도 확대된다.

, 그러니까 이 구원이 관념화되고 추상화되어서 미래에, 내세에 영원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종말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을 받을텐데,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우리가 있게 됨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체험하는가? 우리의 실존의 결단으로 시시각각의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내가 사단을 주로 섬기고 그의 뜻을 좇을 것인가? 하나님 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에 따라 죽음을 열매로 거두든지, 삶을 열매로 거두든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가치 판단의 순간마다,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써 우리가 세례받을 때에 고백했던 믿음(우리를 믿는 자 되게 한 믿음, 우리의 구원의 사건이 되었던 그 믿음)이 지금 현재 실재화(actualize)되고, 그때 얻었던 구원이 지금 현재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 또는 단편적이다. 왜냐하면, 종말에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한 자들에게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어떻게 살라고 가르쳤는가? 두 가지 계명을 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12:28-34).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존과 순종)은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말이다. 보통 사람은 나무나 돌 조각에 숭배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보지만, 예수는 맘몬에 대한 것을 경계하셨다. 돈에 대한 우상숭배는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옛 아담적 자아(하나님이 필요없음,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의존하지 않음 -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의존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자원으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야 한다. 그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수단은 돈이다.), 즉 사단의 통치 아래 있는 자아는 돈으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의 삶의 원칙은 착취의 원칙이 된다. 곧 이웃에 대한 자기 주장이다. 그래서 그런 삶의 자세는 불의와 갈등 곧 상호 공포(삭개오적 존재가치)에 빠지게 된다. (: 미국처럼 인간성의 황폐, 인간 관계의 단절, 갈등, 쾌락주의에서의 죽음 등 한마디로 죽음을 가져온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면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온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나의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신다고 하신다. 내가 그의 무한한 덕을 덧입음, 그래서 내가 시시각각으로 기도 가운데 아빠하고 말하면서 그의 자원을 끌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되고, 맘몬을 상대화 할 수 있다. 그리고 맘몬을 자기 安全幸福의 수단으로 쓰지 않고 이웃을 섬기는데 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맘몬을 섬기면 죽음을 가져오지만, 하나님께 헌신된 자세는 지금 여기에 더 많은 自由와 더 많은 正義와 더 많은 진정한 의미의 풍요를 가져온다. 부의 불공정한 분배는 불의와 자유의 결핍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풍요의 결핍도 가져온다. 의 불공정한 분배는 앞으로 굶어죽는 사람에게만 빈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풍요 속에서도 죽어가는 현상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가 가져오는 구원, 곧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 올바르게 연결시켜서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으로 그에게 의존함과 순종함으로 살고 이웃과 올바르게 관계를 갖는 그런 구원은 종말에 완성될 것이지만, 오늘 여기에서 좀더 많은 자유와 좀더 많은 풍요와 좀더 많은 正義, 平和, 生命의 북돋음 -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온전해지는 무엇에게까지도 - 으로 지금 現在實在로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의 육신적 메시야 사상은, 또 그것의 아류들인 공산주의, 자본주의, 인본주의적 문명 낙관론의 내재적인 메시야 사상은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자유, 좀더 많은 정의, 좀더 많은 풍요도 확보하지 못한다. 여기에 갈림길이 있다.

예수의 메시야 됨이 얼마나 오묘하고 진리다운가!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 또는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본주의적 메시야 사상, 내재주의적 메시야 사상, 그것이 자본주의 형태로 나타나든, 문명 낙관론 인본주의로 나타나든, 공산주의로 나타나든, 해방신학으로 나타나든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메시야 사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진정한 救媛을 가져다 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