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성전

 

.서론

 

예수가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에 대해 취한 태도는 아주 독특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성전에 대하여 한 말-곧 당시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과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는 주장-이 그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죄목으로 내세워짐(14:58/26:61)을 보아서도 쉽게 짐작할 수있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고려하면 이 주제의 중요성을 곧 이해할 수 있다.

 

1.성전은 당시 유대교에서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으나 예수는 그의 공생애 동안 성전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세 공관복음서들에 의하면 그가 그의 생애 끝에서야 한번 성전을 방문하였는데 그것도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1).

 

2.예수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도 아니면서 죄를 용서해주고 병을 치유하며 청결의 예법에 의거 불결한 자로 규정된 자들을 청결케 하는 등 성전의 기능들을 스스로 수행하였다.

 

3.예수는 그의 가르침(7:10-23/15:1-20)과 행위(1:41/5:1/5:25ff/ 7:1ff)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 위해 지키도록 주어진 구약의 레위기의 청결의 예법을 무시해 버리거나 청결과 불결의 문제를 전혀 새롭게 정의하였다.

 

4.예수는 당시 부패했던 성전을 공격하였는데(7:10-12/15:4-6/23:23/11:42/15:15-17)이른바 성전청결(11:11-19)’고 그 한 예이다.

이 모든 사실은 예수와 예루살렘 성전 간에 큰 긴장이 있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예수와 성전이라는 주제는 독특한 것으로서 예수의 자기 이해를 파헤치는데 한 귀중한 열쇠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현대 신약신학(아니 기독교 신학 전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역사적 예수가 스스로를 어떤 분으로 보고 스스로의 사명을 무엇이라고 보았는가(예수의 자기 이해)를 설명하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선포가 그 예수의 자기 이해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위해 지금까지 학자들은 예수가 다른 독특한 점-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 그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부른 점, 그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점 등을 연구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해왔으나 나는 예수와 성전이라는 주제가 이런 것들 못지 않게 분명하고 중요한 열쇠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소논문에서 예수의 성전과의 관계에 개입된 이 모든 문제를 다룰 수는 없다. 여기서는 우선 마가복음 11:27-33의 이른바 예수의 권위에 대한 심문을 자세히 토론하고자 한다. 이 본문에 대한 연구는 에수의 성전청결의 의미와 그의 체포와 재판의 역사적 맥락과 성격을 규명하는데 그리고 예수의 자기 이해를 규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도움을 준다.

 

 

. 예수의 권위에 대한 심문(11:27-33과 병행구)

 

A.전승과 편집

 

이 본문의 마가복음판이 원형이며 마태와 누가는 이를 받아 약간의 문체적 향상을 꾀하였는데 주석가들은 대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내용의 역사적 근거를 고찰해 보고자 하는 본논문에서는 마가판을 주자료로 다루게 될 것이다.

본문에 대한 마가의 편집 부분에 대하여는 의견이 다양하다. 그러나 보통 27절의 전반부는 마가가 편집한 것이며 마가는 이 편집으로 여기 기록된 사건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세번째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비교11:11,15) 즉 성전 사건(11:15-19)이 있었던 다음날 일어난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적어도 27절의 후반부는 마가의 편집이 아니고 전승으로 내려온 기존의 자료 그대로라고 말하는데 반하여 E.J.Pryke27절 전체를 마가의 편집으로 본다. Pryke는 이를 위해 마가에게는 장소나 시간을 나타내기 위해 본문의 시작에 독립소유격(여기서는 περιπατουντος ιερον)을 사용하는 편집상의 특성이 있다는 점과 마가의 편집상의 용어라고 생각하는 γραμματευς, ιερον을 지적한다. 그러나 Pryke도 마가복음 내의 γραμματευς의 총 사용횟수 21번 중 12번 만이 ιερον9번중 6번만이 마가의 편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두 단어를 반드시 마가의 편집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다2).Pryke는 독립 소유격이 사용으로 미루어 보아 27절 전체를 마가가 편집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두 단어도 마마가 편집한 것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사실 Pryke27절 전체를 마가의 편집으로 보는 정확한 근거는 περιπαουντος αυτου 라는 독립 소유격의 사용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것도 마가가 이렇게 편집을하여서 자신이 전승받은 기존자료에서 이야기의 의미를 변화시킨다거나 혹은 그 이야기 전체를 창조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마가는 기존의 자료에 자신이 좋아하는 문체인 독립소유격을 사용하여 예수가 성전 안에 있을 때 유대 지도자들이 다가와 질문을 하였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Pryke 자신이 περιπατειν은 마가의 편집상의 용어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R.Bultmann27절 후반부의 οι αρχιερεις και οι γραμματει και οι πρεσβυτεροι 를 마가의 편집이라고 한다. J. Gnika에 의하면 마가 이전의 기존 자료는 “Und es die Hohenpriester und...(?) an ihn heran und sagten zu ihm usw” 와 같이 시작되며 여기에 본래 서기관들/이나 장로들이 언급되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Pryke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21번의 γραμματευς12번은 마가의 편집으로 보며 여기 27절 후반부의 것도 편집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Pryke가 편집했다고 보는 12번의 경우도 그 단어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기 보다는 그 단어가 들어 있는 구절이 다른 이유로 인하여 편집한 것으로 판단된 경우, 그 안에 들어 있는 단어를 편집으로 간주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쨋든 12번의 경우 중에 적어도 몇몇은 마가가 편집하기 이전의(만일 마가의 편집이 행해였다면) 기존의 자료에도 본래 들어 있던 것일 가능성이 많다. 여기 이 구절에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아마 산헤드린의 대표로 생각되어지므로 이들이 마가에게 전승된 자료에 들어 있었는지의 여부는 마가가 이 예수의 권위 심문의 본문을 예수의 성전사건과 연계하여 기록한 것이 옳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마가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면 예수는 성전사건에 이어서 산헤드린의 세파의 대표들로 구성된 대표단에 의해 심문받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Bultmann이 본래 예수의 권위 심문의 전승자료에는 28-30절만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27절은 없었다고 하고 또한 Gnika가 마가 이전의 전승자료는 어떤 특정한 장소,시간적 틀 없이 시작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들은 그들의 양식비평적 방법론의 전제에 의거해서이다. 즉 복음서 전승의 이야기들은 본래 따로따로 독립된 상태로 전승되어 내려왔고 이들의 장소적, 시간적 틀은복음서 저자들이 창조해 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최근에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양식비평적 방법론으로 여기 본문의 이야기가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는지는 잠시 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양식비평의 전제를 지나치게 신뢰하지만 않는다면 또한 방법론적 회의에 완전히 굴종하지 않는다면 여기 27(혹은적어도 27절의 후반부)예수의 권위 심문의 마가 이전의 전승 자료에 포함되었던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R.Pesch27에 대한 해석이 이 이야기의 맥락에서 볼때 최상의 설명임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 성전에 매일 가르쳤음’(14:49/참고11:17 이하,35)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르치는 동아에 유대 당국자들이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기서 어떤 상투적인 상황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차라리 11:18후의 맥락은 질문자들이 예수가 성전 뜰에 당도하자마자...그에게 다가간 즉 그들이 예수를 노리고 있었던인상을 전달한다

28-30절의 내용이 전승된 기존의 자료라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BultmannGnika33절을 마가의 편집으로 보았다. Pryke33절을 마가의 편집으로 보지 않는다. E.Best분명히 33절이 없으면 이 이야기의 명백한 결론이 없는 셈이 된다라고 이에 대해 적절히 말한다. Bultmann 은 본래 전승된 자료의 끝을 30절로 보는데 이는 그가 보통 랍비들의 논쟁형식이 대응질문으로 끝맺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Bultmann의 견해는 옳지 않다. 랍비들의 논쟁-이야기들중에는 대응질문으로 끝나지 않고 그 대응질문에 대한 상대방의 답변에서 이끌어낸 명백한 결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D.Daube는 이 랍비들이 논쟁 이야기 형식을 연구하여 1)적대자의 질문 2)그에 대한 대응 질문 3)적대자의 답변 4)랍비가 이 대답에서 적대자의 애초의 질문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결론을 내림의 순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 본문의 내용은 이 형식을 따르고 있는 하나의 예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33절의 양식비평적 방법이나 다른 어떠한 방법에 근거하여서도 마가의 편집이라 주장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31절과 32절의 전반부는 예수의 대응질문에 관하여 유대의 지도자들이 토론하는 장면이며 32절의 후반부는 왜 그들이 두번째 답변을 택할 수 없는가에 대한 추론이다. Bultmann은 여기 πιστευειν이란 용어로 미루어 보아 31절 이하는 헬라 그리스도인이나 혹은 마가 자에 의해 만들어져 들어간 것이란 한다. 그러나 Bultmann은 자신의 이러한 제의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구약에 이미 하나님의 사자를 믿는다는 개념이 발견되고 있는데( ל ןימאה;LXX πιστευειν + 여격 예, 4:1,8 이하/대하 32:15/40:14) 어찌하여 팔레스틴에서 유래한 전승이 세례요한에 대해 믿는다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이상할까? Pryke31-32절에 들어 있는 삽입절,32절 후반부의 설명적 γαρδιαλογιζεσθαι, Ιωαννης, οχλος, προφητης, φοβεισθαι 등의 용어를 들어서 이 31-32절은 마가의 편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Pryke가 편집의 근거로 제시하는 두 가지 문법적인 문제와 용어들은 διαλογιζεσθαι만 제외하고는 모두 32절 후반부에 제한되어 있다. Pryke도 단어 하나를 가지고 그 문장 전체를 편집한 것으로 주장하지 못할 것이므로 마가가 전승되어 온 기존의 자료를 사용하여 이 삽일절을 작성했다고 추측하는 것도 과히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다. 또한 οιαλογιζεσθαι라는 단어 하나를 마가가 만들어 넣었다고 할찌라도 그 때문에 31절과 32절 전반부 전체를 마가가 편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Pryke32절 전반부에서 두가지 문법적 오류를 지적했다. ‘마가는 두번째의 조건절 문장(αλλα ειπωμεν εξ ανθρωτων) 을 조건절에 대한 주절이 없이 끊고 설명절인 εφοβουντο..로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설명절에도 ειχον τον Ιωαννην οντως ως προφητης이라고 쓰지 않고 οτι절을 사용하여 οντως οτι προφητης ην 이라고 쓴다.’ 그러나 이것이 문법적 오류는 아니다. 다만 여기 마태나 누가에서와 같이 조건절 문장인 αλλα ειπωμεν εξ ανθρωτων..이 쓰였다면 31절 후반부와 병행구를 이루면서 좀더 깔끔한 문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승된 자료가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수근거림을 좀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하늘로부터라고 말하면 그는 ...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으로부터라고 할까?”

그러므로 문서비평적 근거 아래 이 이야기(27-33)의 전승적 성격이 전체적으로는 의심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32절의 후반부와 어쩌면 27절의 전반부에서는 마가의 편집활동을 어느 정도 확실하게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특히 32절 후반부는) 마가가 기존의 전승자료를 사용했으리라는 추측을 배제할 수는 없다.

 

B.양식비평:Rudolf Bultmann과 그의 영향

 

이 본문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논쟁설화로 간주되며, 이의 양식 비평적 분석을 위해서는 종종 랍비들의 논쟁설화에 견주어진다. 랍비들의 학문적 토론이 논쟁에서는 일반적으로 랍비는 교리적 문제 즉 성서해석이나 유대교의 관행문제 등에 관해 질문받는다. 1)랍비는 대응질문을 함으로써 답변하고자 한다. 2)본래의 질문자는 랍비가 기대하는 대답을 하게 된다 3)그러면 랍비는 그 질문자의 답변으로부터 결론적 답변을 이끌어 낸다 4)많은 랍비의 논쟁설화들은 이런 과정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번 반복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그 기본적 패턴이다.

Bultmann은 이 본문의 이야기를 위의 패턴에 비추어 보면서 30절은 위의 랍비의 논쟁설화 패턴중에서 두번째 즉 랍비의 반대질문 부분과 일치하는데 여기 공격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공격을 물리치는 내용을 함께 담고 있다고 말하였다. “세례 요한이 그의 εξουσια를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듯이 나도 역시 그랬다!” 만일 본문의 원래 전승이 라비의 패턴을 따랐다면 이 대응 질문에 대한 질문자의 반응은 하늘로부터라는 대답이거나 혹은 적어도 그들 사이의 조용한 토론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본문의 31절 이하에 나타난 바는 분명히 랍비의 패턴을 깨고 있다. 그래서 Bultmann은 이는 문제의 핵심을 잘못 이해한데서 나온 마가의 편집상의 첨가라고 한다. 결과 Bultmann23-30절만이 진정나 팔레타인의 apoph gma라고 주장하며 이것은 팔레스타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행함에 대해 적대자들이 비판하자 그에 대한 답변으로 원시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Gam Seng Shae에 의하면 28절에 있는 두 질문은 본래 일반적으로 생각해 온 것처럼 동일한 질문의 두가지 형식이 아니라 두가지의 서로 다른 질문이다. 이 두가지 질문은 본문의 전승사에서의 두 단계를 각각 반영한다. 첫째 질문(28절 전반부)29절 후반, 33절 후반에서 되풀이 되며 두번째 질문은 30절의 예수의 대응질문에 반영되어 있다. 28절 후반과 30절은(αποκριθητε μοι제외) 먼저 단계의 전승을 반영한다. Shse역시 Bultmann을 인용하면서 31-32절은 28절 후반의 질문이나 30절의 대응질문에 논리적으로 부합되지 않으며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과 예수 사이의 유비를 끌어내는 답변과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히 후에 삽입된 것이다. 이런 주장들을 펴며 Shae는 본 논쟁설화에 묻혀 있는 초기 전승은 다음과 같았다고 본다.

28b τις σοι εδωκεν την εξουσιαν ταυτην ινα ταυτα ποιης

29a ο δε Ιησους ειπεν αυτις

30 το βαπτισμα το Ιωαννου εξ ουρανου ην η εξ ανθρωπων

그러나 이것도 랍비의 논쟁설화의 패턴 중 마지막 두 요소 즉 3)질문자의 답변과 4)랍비의 결정적 응답이 빠져있음을 직시하며 Shae는 그러므로 본래 전승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로 이어져 있다고 추론한다.

και ελεγον αυτω

εξ ουραονυ

ο Ιησους αποκριθεις ειπεν:

ουτως εστιν η εξουσια μου

εξ ουρανου

Shae는 이 원래의 전승은 가르침을 위한 토론이었는데 후에는 논쟁설화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Shae는 더 나아가 이 가르침을 위한 토론은 진짜라고 믿는다. 이는 그가 비유사성 원칙에 의거하여 그렇게 믿는 것이다. 예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9:13/11:31/21:32/7:30/요세푸스,Ant.18:116ff) 그리고 또한 복음서들에는 요한을 예수의 하위에 놓는 일반적인 경향이 비추어 볼때 여기 30절에서와 같이(Shae Bultmann의 해석에 의하면) 요한과 예수를 권위면에서 동격으로 보는 것은 독특하다는 것이다. 반면 예수가 요한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참 예수 전승에 잘 나타나 있다(11:11=7:28/11:18=7:23/11:12=16:16).

ShaeBultmann과 마찬가지로 양식사적 전제에 의거하여 30절에서 질문자들이 요한의 선지자적 권위를 인정하였다고 추론하는데 그렇다면 현재의 본문 27절 후반부의 질문자들로 나타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이에 부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대 지도자들은 요한을 선지자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Shae27절 후반부는 전승의 초기 단계의 것이 아니며 31-33절이 첨가되는 후기 단계에서 같이 첨가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이 마가 복음의 맥락에서는 이 이야기가 예수의 성전사건과 관련이 있는 듯이 기록되었으나 본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하여 Shae는 이 본문이 원래의 전승의 Sitzim Leben28절의 ταυτα가 본래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이 점에서 ShaeBultmann의 추측을 뛰어넘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ταυτα....아마도 예수가 주도했던 전체의 활동 즉 그의 운동에 참여하도록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면서 시작하였던 그 운동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여기 이 질문은 아마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예수도 그들중 하나였을 것인데)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의 사역을 요한의 사역과는 성격이 다른 새로이 등장한 하나의 운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질문자들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짧고 명백한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세례 요한의 종말론적 세례사약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내가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권위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Shae는 이 가르침을 위한 토론 즉 논쟁설화로 발전되기 전단계의 전승이 마가에 이를 때쯤엔 성전과 교회 간의 논쟁 이야기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이 변모는 후기(마가 이전)전승이 다음과 같이 두가지를 표현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예수는 유대의 가장 높은 지도자들까지도 심판할 권위를 지닌 분이다. 2)유대의 지도자들은 세례요한에 대한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31절 이하) 심판받게 되었다.

Shae는 이 마가의 논쟁 설화의 삶의 정황에 대해 계속 추측하면서 마가가 이것을 편집했던 시기의 이 논쟁설활의 의미를 논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그 내용을 요약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요약된 내용만 해도 이미 많은 문제성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심문의 본래 전승을 추측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Shae Bultmann은 이 전승이 랍비의 가르침을 위한 토론이나 논쟁설화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다. 이 전제를 근거로 하여 그들은 27절과 31-33절은 원래 전승에는 없었던 것으로생각하고 그것들을 자신들이 가설적 문장들로 대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제가 과연 옳은 것인가? 28-30절 또는 Shae가 가설적으로 재구성한 원래의 전승 안에서도 예수가 선생님으로서가 아니라 준사법적인 심문을 받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과 여기에서의 논쟁의 햄식이 교리적 문제, 성서해석이나 종교적 문제가 아니가 하나의 개인적인 도전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벌써 이 본문을 랍비들이 토론이나 논쟁설화의 틀 속에 끼워넣는데 주저해야 함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주저하게 되는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BultmannShae의 양식비평적 결론이 그들이 쓰는 양식비평적 방법론의 주요 전제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즉 그들의 양식비평적 분석은 원래의 전승의 요점이 예수의 권위를 세례요한의 권위와 견주어 후자와 동등함을 주장함으로써 예수의 권위를 증명하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가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이 전승이 형성되거나 전해져 내려오게 된 Sitz im Leben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원시교회가 예수의 권위를 세례요한의 권위와 견주어 후자와 동등함을 주장함으로써 예수의 권위를 변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원시교회의 경향과 배치된다.

만약 예수의 권위에 대하여 또는 원시교회에 대하여 도전한 사람들이 요한의 제자들이었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에 그렇게 했을 것이며 그들은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예수가 한때 자기들과 같이 요한의 제자였음을 지적하면서 그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시교회가 이러한 도전을 어떻게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았듯이 예수도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권위를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물리칠 수 있다고 상상하겠는가? 요한의 제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예수가 요한에 의해 세례받은 사실과 그가 한때 요한의 제자였음을 지적함으로써 아주 간단히 무력화시켜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원래의 전승은 그러므로 예수의 생전에 일어났던 사건의 참된 기록이라고 본다 해도 Shae는 이 문제를 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과 동격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예수에 의해 설득되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백보양보하여 예수가 요한의 제자들의 도전에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아주 어설프게 대응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해도 원시교회가 이런 이야기를 보전하고 전승하였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원시교회가 그들의 주인 예수가 분명히 논쟁의 패배자로 또는 설득력 없는 선생으로 나타나는 이 이야기를 전승함으로써 무슨 이익을 얻으려 했겠는가?

Shae가 자신의 전승사적 재구성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고 보는 28절의 두 질문을 잘하자면 그들이 전승사의 두 상이한 단계들을 반영하는 두개의 상이한 질문들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보듯이 한 질문이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 우리는 우선 사도행전 4:7에 있는 εν ποια δυναμει η εν ποιω ονοματι..가 본문 28절의 두 질문들과 유사함을 Shae가 부인하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다. 그는 사도행전 4:7의 위 구절이 본문 28a(εν ποια εξουσια...)에만 유사하다고 보는데 이것은 사도행전 4:7εν ποιω ονοματι가 본문 28bτις σοι εδωκεν την εξουσιαν..와 아주 유사하며(둘다 권위 부여자의 이름을 대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도행전 4:7εν ποια δυναμει는 본문의 28a(εν ποια εξουσια)와 아주 유사함(δυναμις εξουσια는 거의 동의어임)을 간과하는 것이다.

둘째로 28b의 원래 질문이 재해석되어 초대교회의 기독론적 관심을 표현하는 새로운 질문에 종속되었다Shae의 주장은 대단히 이상한 것이다. 어째서 28a의 질문이 28b의 질문보다 기독론적 관심을 더 싣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28b의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님이면,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일들을 행하도록 권세를 위임받은 사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28a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인 내게 주신 권세이다. 사실이 이럴진데 28절의 두 질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사실 접속사 η 관사 την 그리고 지시 형용사 ταυτην을 통하여 둘째 질문은 첫째 질문의 요점을 좀더 정확하게 하고 있다. 하나님의 한 선지자나 사자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거나 권위를 부여받을 경우에만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구약과 유대교의 배경(18:15-22)에 비추어볼 때, 예수를 하나의 메시야나 선지자로 사칭자로 본 적대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이중질문 형식으로 심문하였으리라는 것을 별 무리 없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권위의 성격에 대한 질문이 그 권위의 부여자가 누군가의 질문에 의해 좀더 정확해지고 설명되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권위의 부여자에 따라 그 권위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M.Black28절의 두 질문들을 셈족 시혀익의 특성인 parallelism of lines의 한 예고 보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31절에 있는 적대자들끼리의 토론내용이 28절에 나오는 질문과 30절의 대응질문과 논리적으로 잘 들어 맞지 않는다는 BultmannShae의 견해 역시 근거 없는 것이다. 양식사적 전제에 의거 본문이 요한과 예수와 의 유비로 해석되어야만 의미있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만 30절과 31절 사이에 논리적 단절이 있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는 그럴 듯하지 못함이 이미 위에서 판명되었다. 28절에 나오는 적대자들의 질문의 성격,31-32절에 있는 그들끼리의 상의,그들의 답(우리는 모른다),33절의 예수의 결론적 응답(나도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겠다) 등이 우리의 본문이 랍비들의 토론이나 논쟁의 일반적인 형식과 좀 다름을 보여주어 오로지 양식비판적 방법론만 써야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에겐 껄끄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본문을 그런 불필요한 양식사적 전제없이 본다면 거기에 아무런 논리적 단절이 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우리의 본문이 ein einheitlicher Bericht로서 훌륭한 의미를 이루고 있음이 뒤에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BultmannShae의 양식비판적 접근방식은 무너지고 만다. 그들은 본문의 전승을 랍비들이 토론이나 논쟁의 형식에 맞추기 위해 상당한 수술을 가하고도 본문의 설득력있는 해석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런 상당한 수술과 복잡한 전승적 재구성을 통해 하나의 그럴듯한 해석을 얻을 수 있다 해도 그런 무리한 방법은 그렇지 않고는 설득력 있는 해석을 얻을 수없을 때만 써야 한다. 그러나 본문이 지금 있는 대로 아주 훌륭한 뜻을 나타내고 있으며 더구나 다른 곳에서도 잘 관찰되는 예수의 주장과 그 주장의 לשׁמ 특성과 잘 들어맞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C.새로운 해석

 

이제까지 고찰에서 두가지의 점들이 확실해졌다. 1)우리의 본문을 하나의 논쟁설화라고 볼 수 있으며 넓은 의미로 유대교(또는 랍비)의 논쟁설화와 비교할 수 있으나 본문의 몇 가지 독특성들로 말미암아 본문을 후자의 형식에 딱 들어맞게 맞추려고 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 2)본문에서 예수의 대응질문의 초점은 세례요한과 자신 간의 유비 또는 동격성을 유도하려는데 있다는 비교적 널리 퍼진 견해는 이제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

여기 새로운 해석을 시도함에 있어 30절에 있는 예수의 대응질문에서 시작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제안하고 싶다. 예수는 당시 유대교(또는 랍비들)의 예에 따라 그의 질문자들에게 대응질문을 함으로써 응답한다. 하나님에 대한 아주 유대식 이명(하늘)과 역시 매우 유대교적 대조-하나님과 인간-를 쓰면서 예수는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는지-즉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위를 위임받았는지, 또는 사람으로부터 인지’-즉 피조물이고 죄악스런 인간드로부터비롯되어 신적,절대적 권위가 없는 것으로 보는지를 묻는다.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의 요한의 세례는 세례요한과 세례운동을 특징으로 가진 요한의 사역 전체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견해를 내세우기 위해 V.Taylor는 이 표현을 사도행전 1:2218:25το βαπτισμα Ιωαννον와 비교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두 곳 모두에서 이 구절은 구체적으로 요한의 세례를 읽컫는다. 그리고 사도행전 1:22에서는 그것들 더 구체적으로 에수의 사역의 출발점으로서 요한에 의해서 예수가 세례받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세례요한이 하늘로부터 왔느냐(ηλθεν)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왔느냐?’(참고 마11:10=7:33)로 되어 있지 않고 세례요한이 하늘로부터 보내졌느냐(απεσταλη)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보내졌느냐?’로도 되어 있지 않는 것은 아마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일 것이다.

또 사도행전 5:38에서 εξ ανθρωπων-εκ θεου 대조가 사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들의 βαυληεξργον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했느냐 아니냐에 관한 것이란느 것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고로 우리는 본문의 30절에 있는 요한의 세례는 요한 개인이나 그의 사역 전체라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요한의 세례를 의미할 개연성이 높다. 사실 요한의 사역이 세례운동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두 해석들 간에 무슨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디에 초점과 강조가 있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우리의 지금까지의 고찰은 본문에서 초점이 구체적으로 요한의 세례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면 30절의 대응질문은 요한이 그의 사역을 위해 하늘로부터 권위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요한의 세례의 성격이 무엇이냐 이다.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 것이냐 아니면 단지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가? 많은 주석가들이 30절의 대응질문을 전자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질문의 초점을 요한과 예수의 유비로 보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해임은 이미 밝혔다.

30절의 대응질문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요한의 세례를 일컫는다면 31절의 αυτω는 중성으로서 요한이 아니라 30절의 요한의 세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적대자들이 예수가 왜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임박한 종말을 위해 그것(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표시로 받지 않았는가라고 비난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32절에 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요한이 언급된 것을 보면 31절의 αυτω는 아마 남성으로서 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요한을 지칭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적대자들은 예수가 왜 그들이 요한을 그의 회개의 세례를 베풀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느냐고 비난할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해석가들이 αυτω를 남성으로 보고 요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30절에 있는 예수의 대응질문의 초점이 요한과 자신 사이의 유비에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인데 그 전제가 옳지 않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πιστευειν 동사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다고 주장하는 세례를 지칭하는 여격과도 또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인물 요한을 지칭하는 여격과도 똑같이 잘 맞으므로 αυτω를 남성으로 보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은 오로지 위에 관찰한 점, 31c와 같은 기능을 성취하는 31b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요한이 언급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31cαυτω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요한을 지칭한다는 것은 30절의 το βαπτισμα το Ιωαννον가 요한과 그의 사역 전체라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요한의 세례를 지칭한다는 우리의 결론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31c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연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왜 그러면 너희는 요한을 세례를 베풀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선지자로 믿지 않았는가?”

32a에는 적대자들이 요한의 세례가 요한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비롯되어서 신적인 권위가 없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한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이 답변이 불가능하거나 유익하지 않음을 깨닫고 이 논의를 중단한다. 왜 그것이 유익하지 않은가에 대한 이유는 32절에 마가가(내용은 아마 마가가 받은 전승에 기초하여) 공급하고 있다. 적대자들은 요한이 선지자였다고 본 군중들의 분노를 야기시키지 않을가 두려워했다. 만약 적대자들이 요한의 세례는 인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답한다면 이것은 군중들의 눈에 하나님에 의해 위임받은 선지자의 사역을 인간의 방자한 (그러므로 죄된) 행위로 모욕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위임 자체를 부인하는 행위로 보일 것이다.

31a은 적대자들 간에 의논이 있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승의 원래 보고자가 그들의 속삭임을 엿들었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31-32a의 내용은 그 보고자가 적대자들의 ουκ οιδαμεν(32a0 이라는 답에서 그와 같은 생각이 그들의 마음에 스치고 지나갔거나 그들 간에 속삭여진 것으로 추론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예수의 대응대답이 적대자들로 하여금 하늘로부터이다라는 대답을 유도하여 마찬가지로 나의 권위도 하늘로부터 왔다라고 선언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밝혔다. 그러므로 본문 전승의 보고자가 31-32a의 한 추론은 예수가 그의 대응반응에서 의도한 것과 일치한다. 예수는 그들이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것으로 본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왜 그러면 요한을 믿지 않았냐고 추궁하려 하였고 또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군중들 앞에서 방자한 인간의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모독하지 못하도록 하려 하였다. 이것은 적대자들이 요한의 추종자들이나 동조자들이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학자들은 예수가 여기서 난처한 심문을 피하기 위해 편법을 쓰고 있다는 견해를 부인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들이 요한을 믿지 않음을 책망함으로써 말하려 했던 진정한 요점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가 그의 권위의 기원과 성격에 관련하여 요한의 세례의 기원과 성격에 대해 질문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질문자들이 요한의 동조자들이 아닐 경우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고 추궁할 의도였다면 만약 그들이 요한의 동조자들이어서 그의 대응질문에 하늘로부터이다고 대답한다면 예수는 어떻게 응답하려 했을 것인가? 예수의 대응질문이 그의 권위의 기원과 성격에 대해 도전하는 적대자들에게 하나의 회피를 위한 편법이 아니라 진지한 대답의 시도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가?

예수의 대응질문이 편법이 아닌 바에야 요한의 세례가 예수의 권위의 기원과 성격과 무엇인가 연관이 있어야만 좀더 정확히 말해서 요한의 세례가 예수의 권위를 입증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만 예수의 대응질문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서 내에 기록된 세례 요한에 의한 예수의 세례 장면을 생각나게 하는데 이 기사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내리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 나와 있다(1:10과 병행구). 예수의 권위와 요한의 세례가 그와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이 대응질문에서 요한의 세례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그의 대응질문에서 분명히 요한에 의한 자기의 세례를 염두에 두고 요한의 세례를 언급한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자신의 권위가 하늘로부터’(그 권위를 예수께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임과 그 권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임을 암시한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의 본질과 기원과 관련하여 요한의 세례를 언급한 것은 예수의 세례에 관한 공관복음서의 기록이 진실한 것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즉 예수는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혹은 메시야로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때가 바로 자신의 세례 시라고 이해하고 또 요한의 세례라는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임을 받았다고 이해하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요한의 세례에 관한 예수의 이러한 이해를 전제하지 않고는 본문 예수의 권위에 대한 심문에서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언급한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예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권위와 사명을 부여받았으므로 다시 말해 어떤 의미로는 예수의 권위와 사명은 요한의 세례(혹은 요한)을 통해 예수께 부여되었으므로 예수의 권위와 사명은 오직 요한을 하나님의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선지자로 믿는 자들에게만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 예수가 자신의 권위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질문을 응대하면서 그 질문자들에게 요한의 세례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믿는지 혹은 인간의 외람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는지를 질문한 이유였다. 적대자들은 양쪽 답변이 모두 적절치 못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ουκ οιδαμεν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에게 예수는 자신의 권위의 본질이나 기원에 관한 어떤 설며을 해주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위와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근거가 되는 바로 요한의 세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예수의 권위의 본질이나 기원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31-32a의 질문자들 사이에 있었던 수군거림의 내용에 대한 기록자의 추측은 예수가 이 대응질물에서 의도했던 바와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예수는 요한에게 동정적이지 않음을 알았고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신의 권위와 본질과 기원에 대해 그들을 납득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위의 본질과 기원이 실제로 요한의 세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들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하는 대신 요한의 세례를 언급함으로써 답변을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예수가 그들이 요한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책망할 때 우리는 사실 요한을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되돌아 보니 그가 진정한 선지자였음을 이제는 믿을 수 있겠다. 그런데 어떻다는 말이냐?’ 라고 답변한다면 아마도 예수는 요한에게서 자신이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명과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은 적어도 이론상 가능하다. 또한 그들이 요한에 대해 비동정적인 답변을 하였을 경우에도 예수는 그들이 지산의 대응질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암시적 주장을 알아챌 수도 있으리라고 (만일 그들에게 들을 귀가 있다면) 기대하였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렇게 이 본문의 이야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의 권위에 대한 심문에 예수께서 간접적으로 답변하는 것이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 사명과 권위를 지닌 자라는 주장을 암시적으로 하는 것은 복음서 전체에 나타나는 예수의 특성이다. 이 대응질문도 예수의 이러한 잘 알려진 특성-לשׁמ특성(참고 막4:9)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 애매모호한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다만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만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31-32a를 포함하여 이 본문에 대한 위와 같은 고찰은 질문자가 27절에 적힌 대로 유대 지도자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31-32a 을 제제외하고 보아도 결론은 마찬가지이다. 28절의 질문,30절의 대응질문,33절의 결론에는 다음과 같은 뚜렷한전제가 있다. 1)질문자들은 예수의 사역에 진정한 흥미를 가지고 있는 동정적인 입장의 사람들도 아니고 에수의 답변으로 설득될 수 있을 정도로 중립적 입장의 사람들도 아니라 2)그들은 예수의 사역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자들이었다. 3)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심문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보통 유대인들은 위와 같은 세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례요한을 따르던 자들이라면 혹시 위의 특성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장에서 우리는 질문자들이 요한의 제자들이었더는 견해를 부인하였다. 그러므로 31-32a를 빼고 28,30,33절만 고려해 보아도 그들은 질문자들이 유대 지도자들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27절에 나오는 이 질문자들에 대한 진술은 우리의 이 추론과 잘 일치하고 있다.

 

예수와 성전(김세윤).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