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성령론 정리

(원제 : 서철원 교수의 하나님의 구속경륜과 성령신학 요약 및 정리 )


강대훈(총신대학교)

1. 서론

 20세기 초엽에 일어난 오순절 운동은 성령 추구의 운동으로서 예수 믿음과 성령 체험을 함께 바란다. 이들은 예수 믿음 이후에 별도의 과정을 통해서 성령 세례를 받아야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을 체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반드시 그 물리적 증거로서 방언을 하게 된다고 본다. 기성 교회들에 이 운동이 파급될 때는 방언의 은사 강조에서 예언과 신유의 은사가 함께 강조되어 은사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기존 교회에 파급되었다. 오순절에서는 성령 세례에 방언을 불변적으로 따라오는 사항이라고 확정한다. 방언이 반드시 동반하는 성령 세례는 예수 믿음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예수를 믿을 때 방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는 중생 후에 일어나는 별도의 과정이다
 

오순절 부흥운동은 알미니안 감리교회 지반에서 발행했다. 알미니안 감리회 신학에서는 주권적 은혜의 역사에서 인간의 주도성에로 강조점이 넘어와 하나님의 은혜가 쟁취된다. 자기의 노력과 열성이 성화를 이루어 그것에 근거하여 의를 획득한다. 인간의 주도성과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를 결정한다. 성화 노력의 정도가 신자의 공로가 되어 칭의를 결정한다. 인간이 주도권이 은혜를 결정하는 완전주의 지반에서 오순절 운동이 출발했다. 인간의 선한 종교적 노력이 성령 세례를 획득하되 노력과 열성의 정도가 성령의 양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영웅적 노력을 한 사람이 넘치는 성령을 받아 분배한다. 오순절파에서는 통상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중심에 선다. 부흥운동은 일반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서 출발한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 운동이었는데, 공교회는 초기부터 성령운동에 대해 우려와 불안, 회의와 경계로 대했다. 2세기 중엽에 일어난 몬타누스의 성령 부흥운동 때부터 그런 염려를 교회에 주었다. 종교개혁 때 나타난 광신파들의 성령운동도 종교개혁 세력의 경계를 받았다. 광신파에 의해 성령의 직접적인 말씀과 내적 조명을 강조하여 성령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을 약화하여 내적 체험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오순절 운동에서 이슈가 되는 논쟁은 성령 세례다. 성령 세례는 중생 후에 받는 별도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성령 세례 논의를 중심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성령 세례가 오순절파의 주장처럼 중생후에 별도의 과정으로서 받되 예수 믿음을 넘어서는 종교적 노력들로 받는지, 은혜의 종교이므로 예수를 믿을 때부터 성령을 받아 가지는지에 대해서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논의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강림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 강림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이고 그 성취임이 바로 이해되지 않으면 성령세례가 중생 후에 온다는 오순절파의 주장을 바로 교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성령 받음이고 예수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다. 예수 믿음과 성령 세례가 동시적임을 바로 밝히기 위해 성령 강림이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먼저 논증해야 한다. 이러한 개념은 개혁신학의 입장인데, 개혁신학의 성령 논의가 가장 바르고 성경적이라는 관점에서 성령논의를 할 것이다.

2. 오순절 운동의 시작과 확산

 오순절 운동은 사도행전 오순절의 예루살렘 교회처럼 성령 세례를 받고 그 표로 방언해야 한다는 신학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성령 세례를 추구했다기보다는 방언을 열렬히 추구하였다. 방언이 없으면 오순절파로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방언을 하면 성령 세례를 받았음이 당연하게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순절 운동은 방언을 추구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본격적인 오순절 운동은 190649일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가에서 흑인 감리교회 목사인 윌리암 씨모어(William Seymour) 목사의 부흥회에서 출발되었다. 씨모어는 방언운동을 시작한 찰스 파함(Charles Parham) 목사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1906년 보다는 더 올라가야 할 것이다. 찰스 파함은 감리교회 목사였지만 성결운동의 목사로서 일하였다. 그는 칭의의 제2역사로서 성화와 신유, 주의 재림 교리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 표로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한 여학생에게 안수하고 나서 중국어를 말하였고, 그 다음에는 보헤미안 방언을 말하였다. 이것이 20세기 방언이 일어난 최초의 사건이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운동이기 때문에 많은 개신교회들의 관심을 가졌다. 주요교단들에 침투했고 주로 평신도들에게 방언의 매력으로 호소되었다. 은사운동은 성령 세례와 함께 방언과 예언 그리고 신유의 은사가 강조된다. 오순절 신학의 은사 운동이 로마 교회로 퍼지면서 성령 세례 대신 영의 해방을 강조하게 되었다. 세례를 통해서 성령은 이미 받았고 견신 때나 그 후에 방언과 다른 은사들을 경험하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은 세례에서 출발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오순절 운동이 은사 운동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David D. Plessis에게서이다. 그는 1936년 영국인 오순절파 부흥사인 스미스 Smith W. Glesworth의 예언을 받고 은사 운동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다

 동남아에도 오순절 운동이 크게 퍼져 인도네이사에서는 1960년대 큰 부흥을 경험하여 개신교회가 1500만명의 인구를 포용했다. 한국에는 1950년 중반 남부 순천 지역에 오순절 운동이 들어온 이후 1970년대에는 서대문 순복음교회가 단일 교회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교회로 성장했다. 이 성장은 다른 교회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교회 성장의 모범이 되어 오순절 교회의 교회 성장 기법들을 도입하는 교회가 급증했다. 이처럼 세계 각처에 퍼진 오순절 운동은 개신교회와 로마 교회에 전파되어 오순절 교단을 구성하지 않고도 은사운동으로 계속되고 있다.

3. 오순절 운동의 신학: 중생후 성령세례

-방언이 세례의 증거-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 세례를 중생 이후에 별도로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오순절 운동이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중생 후 성령 세례의 과정이 사도행전에서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근거로 사도행전을 해석한다. 사도행전을 성령 세례의 근거로 삼는 오순절주의자들은 구속사의 섭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종말론적 사건이어서 반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주의는 성령 세례 받는 것을 오순절의 반복으로 이해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집단 회심도 반복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는 메시야 임직식이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우리의 출생과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성 확인으로 출생하셨다. 그러므로 중생이 아니고 새 창조의 시작이다. 우리의 구주이시며 새인류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세례를 받았으므로 예수를 믿으면 곧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 된다

 

 오순절 운동은 처음부터 성령을 추구했다. 성령 세례의 형식으로 성령을 충만히 받아 증거와 봉사를 위한 능력을 입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면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한 것이다. 토리는 성령 받는 조건을 일곱 가지로 강조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토리의 견해를 근거로 성령 운동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토리에게세 있어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고 나서 세례를 받았다고 믿으면 성령 세례는 조용한 현상이지만, 오순절파는 황홀한 경험과 방언을 해야 한다고 했다. 토리는 1926년 오순절 운동을 거부했다. 오순절 운동의 주요 교단들은 방언을 성령 세례의 증거로 교리화했다. 1914년 교단을 구성한 하나님의 성회는 방언을 성령 세례의 초기 증거로 확정지었다

 오순절 운동은 19세기 미국 성결 운동에서 발생하였다. 성결 운동은 감리 교회 뿌리에서 시작했으나 성결 운동의 순간 성화가 감리교와 달라 성결 교단으로 출발했다. 웨슬리의 감리교 신학이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계기로 장로교 신학 속으로 들어 왔다. 그러다보니 미국 신학은 알미니안적으로 변화되었다. 웨슬리의 신학에서 믿음은 칭의를 위한 유일한 조건이며 완전 성화의 유일 조건이라고 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교리는 성화이다. 이 성화는 인간의 주도적 노력과 선행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 성화에 의해서 최종 칭의가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기의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회개와 함께 선행들은 성화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칭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칭의는 법정적 칭의가 아니라 도덕적 의가 된다. 성화에 근거해서 칭의가 이루어지고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요소가 된다. 웨슬리 신학은 인간의 주도적 노력 없이는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지 않으며, 구원하시지 않으신다고 본다. 구원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므로 경험이 최종 표준이 된다. 성경도 표준이 되지만 경험이 마지막 결정권을 갖는다. 이처럼 경험의 신학이 오순절의 경험주의적 성령운동에 영향을 준다.   오순절주의는 중생/구원 다음의 경험으로 성령세례를 강조한다. 이 세례에는 방언이 수반된다. 이 성령 세례의 경험은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 편에서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오순절파는 유대교처럼 신약의 은혜를 공로로 바꾸었다.

4. 오순절의 성령 강림 :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성령을 받아서 구원이 성취되는데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어지는 것이다. 성령은 새 인류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다. 성령께서 그의 몸인 교회에 부어지기 위해서는 그의 구속 사역이 선행해야 했다. 그러므로 성령 파송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후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예수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에만 가능하다(7:37-39).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후에는 믿으면 다 믿음의 약속인 성령을 받게 되어 있다(1:14,22). 예수 믿는 자는 다 성령을 받게 작정되었고 약속되었다(7:37-39).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령님을 받은 존재가 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로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아버지께 청구하셔서 구속을 위해 오셨다. 성령 강림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공로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전에는 성령강림이 없었고, 불가능하였다. 바로 이 진리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예수 믿었던 사람들이 성령 받지 못한 이유이다. 예수 믿으면 다 아버지의 약속대로 성령을 받게 되어 있지만(3:14), 예수 재세 기간 에는 성령 받을 수 없었다.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가능해졌고 또 실제로 그 구속 때문에 성령 파송이 이루어졌다. 성령은 보혜사로 백성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안에 내주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성령 강림의 근본 목적은 백성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데 있다. 성령의 내주가 그의 사역의 일차적 목표이다. 그러나 오순절파는 성령의 보혜사 직임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에 관심을 둔다.  

5. 신약의 증거들: 믿음으로 성령 받음=예수 믿음=성령 받음

 성령 세례는 중생 후의 과정이 아니고 예수 믿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성령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는 것이 구원의 과정이다. 성령께서 믿음을 일으키시고 그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중생을 주시며 그들 안에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물세례로 신앙 고백하여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였다. 오순절에 세례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한 자들은 그 고백과 함께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오순절파는 사마리아인들의 개종과 성령 세례를 분리한다. 그들은 중생 후 성령 세례를 받는 도식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한 것은 빌립의 전도를 받아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을 받아서 확실하게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신약 교회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예수 믿은 것과 성령 받은 것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바울이 예수를 만난 시각과 성령을 받은 시각 차이에는 3일간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순절주의자들은 중생 혹은 예수 믿음 후 성령 세례 받는 것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3일전에 예수 믿고 그 후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니다. 세례 받은 것은 바로 신앙 고백이다. 바울은 자기의 경험과 갈라디아 교회 설립 시 경험에 근거하여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 간에 아무런 시간적 거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3:2-5). 오순절주의자들은 아볼로도 제자들의 전도로 중생을 얻고 바울에 의해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볼로는 전도하여 세례를 주었지만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했다. 그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믿어 성령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남았다. 그들은 예수를 믿지 못했으므로 성령 세례가 임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오순절파는 사마리아인들의 개종과 성령 세례를 분리하는 것은 분명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데서 온 잘못이다.

6. 성령 세례=성령 받음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셔서 예수의 성령 파송 약속(15:26; 16:7), 성령 받으라는 명령(20:22), 성령 세례(1:5)가 성취되었다. 오순절에 성령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20명의 육체에 부어졌다(2:1-4). 그 전에는 예수의 육체에만 거주하였던 성령(1:33-34; 3:34)이 많은 사람들의 육체에 부어져 내렸다. 성령 세례는 예수의 메시야의 임직에 적용된다. 백성들의 성령 받음은 성령 받음, 성령 부어주심, 성령 충만으로 표기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 믿음으로 성령 받음을 약속하였다(2:38). 성령 강림 후에는 더 이상 성령 세례는 적용되지 않았다. 주 예수의 약속을 회상하여 한번 반복함밖에 없다(11:16). 성령 세례는 성령 강림 이후에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았다. 대신에 받는 것, 성령의 충만, 성령의 내주 등으로 나타났다.

7. 성령 받음=선물로 받음 

 복음 선포가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선포된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발생한다. 들음과 믿음이 분리되지 않고 일치한다. 복음을 듣게 되는 것이 은혜이어서 믿음의 들음이 바로 은혜이다. 성령은 아들의 영이므로 아들의 영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청구하면 성령이 오사는 것이 아니고 믿으면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보내신다. 인간의 종교적 노력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성령은 선물로 받는다.

8. 성령 강림의 목적=하나님의 거소 마련  

 하나님 혼자 계심을 만족하지 않고 백성을 지으사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조성하사고 언약을 체결하사 그들을 자기의 백성 삼으셨으므로 그들 가운데 오사 거하시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가 아니고 언약의 주로서 백성들에게 오시고 섬김을 받으셨다. 백성들과 교제하시며 실제로 그들 가운데 사셨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증거하여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그들에게 임하여 오사 내주하신다. 성령이 내주하시면 하나님의 거소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하나님의 거소 조성이 성령 강림의 목적이다. 성령의 거주가 하나님 자신의 거주이다. 예수의 피로 구속되었으므로 이렇게 성령의 내주가 그리스도인 각자 안에 이루어진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거룩해져야 한다.

9. 성령의 내주=지속적인 인격적인 관계맺음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신자들 안에 거주하신다. 기독교 구원의 신비는 성령의 내주로 시작하고 진행된다. 하나님의 영이 오사 친히 신자들 안에 거주하신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성도와 함께 하심이다. 신자와 지속적인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계속 이어진다.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육체 안에 거하신다, 곧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고 하는데, 이것은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신비를 기독교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보혜사이신데,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이시다. 연약한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이끌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령께서도 행하시기 때문에 백성들은 위로와 새 힘을 얻게 된다. 이처럼 원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령께서 행하신다.

10. 성령 충만=성령의 지배

 성령의 인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한 백성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을 감화하고 역사하여 죄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어 온전한 순종을 이루게 역사함이 성령의 인도이고 지배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백성 되어야 하므로 성령이 역사해야 한다. 바울은 성령 충만을 에베소서 5:18에서 한번 사용하였다. 다른 서신들에서는 성령의 인도로 표현하였다. 에베소에서 말하는 충만은 문맥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통치를 말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고 했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이렇다: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으라.” 바울은 현재 수동태 명령형을 사용하여 성령을 충만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계속 충만케 되어져 있어야 할 당위를 표시한다. 전체 문맥으로 보아 이 구절은 성령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됨 곧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됨을 뜻한다. 성령의 인도는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적으로 죄악을 벗고 거룩해진다. 성령의 지배받는 자들만이 죄를 죄로 알고 죄를 벗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 때만 살 수 있다.

11. 성령으로 인침=구원의 보장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다고 할 때 그것은 백성이나 장소를 자기의 것으로 택하심을 못하고 자기의 소유로 확정함을 뜻한다. 구약에서는 한 장소를 택하여 그 곳을 자기의 전으로 삼음을 나타내었으나 신약에서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둠으로 그들을 택하여 자기 백성을 삼았음을 지시한다. 택함 받은 자들 곧 구원받은 자들의 이마에 어린양이 자기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두셨다. 그리하여 확실하게 구원받은 자들임을 표시한다.

12. 성령 받았음의 증거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성령을 받아 가진 자들이다.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성령은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성령은 선자에게 내주하설 때부터 죄를 제거하고 또 계속하여 죄와 투쟁하게 역사한다. 죄를 책망함으로 죄에서 돌이켜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 그리하여 죄를 벗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역사한다. 예수를 주라고 하는 신앙 고백은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가장 친근한 호칭인 아빠로 불렀다. 하나님께서 믿어 아들들인 자들의 마음에 성령 곧 자기 아들의 영을 보내신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여 믿는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

13. 성령의 사역: 전도와 성화

 성령께서는 전도의 영이시다. 증거의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선포를 받아들여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의 모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한다. 이것이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복음의 선포는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복음 선포에 역사하여 성령은 사람들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한다.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면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믿음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가 성령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중생시킨 영혼들에게 내주하사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살게 한다. 칼빈은 성화가 바로 중생의 열매들로서 성령 내주의 증거라고 보았다.

14. 성령의 능력: 복음전도의 능력 

 믿는 지들은 죄를 벗고 거룩해져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예수 믿으면 성령을 받아 영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존재가 된다. 이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의 역사와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진리에 이르는 길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깨닫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기적과 신유 능력 행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증거를 힘 있게 이루는 능력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사람들의 예수 믿음을 위해 능력을 행사한다. 성령은 그의 모든 능력을 이 두 가지 일에 집중하였고, 전도와 신앙을 위해 능력이 행사되게 하였다. 성령의 역사 없이 복음의 선포와 사람들의 예수 믿음은 발생하지 않고, 또 선포는 이루어질지라도 효과는 없다.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들로 믿음에 이름은 능력과 성령으로 된다.

15. 능력의 길: 기도

 그리스도 자신이 끊임없는 기도 생활을 통하여 큰 능력을 행사하였다. 성령의 임재가 바로 그리스도 임재이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에게 약속된 주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행사하는 길은 기도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임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한다.

16. 능력의 소실

 성령의 역사는 기도로 나타난다. 성령을 전적으로 유지할 능력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기도로 성령님의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때 능력을 얻어도 능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육체의 욕망들을 추구하고 살면 능력을 소실한다. 능력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는데, 이는 기도로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므로 기도를 통해서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17. 성령의 은사들

 은사에 관련된 내용들은 고전 12:8-10; 12:28; 12:29-30; 12:6-8; 4:11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봉사를 하고 위로하고 구제하는 일, 치리는 계속되고 있으나, 나머지 은사는 오용될 수 있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주어진 재능들이 개발되고 활용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이다. 그러나 계시 전달의 성격을 갖는 예언과 방언과 방언의 통역은 신약 성경의 완결로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므로 중단하였다. 방언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은 계시나 권면의 내용의 전달이 아니고 자기 과시를 위해서 오용되었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이러한 은사는 은혜의 표현이므로, 은혜가 주어지면 은사들이 나타난다. 은사들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에 의해 몸의 지체들에게 배분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주문해서 은사를 받을 수 없다. 은사는 인간의 공로에 의해 획득된 것이 아니라 선물이다. 성령께서 주신대로 받는다.

18.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

 인류 역사상 예수만이 성령을 전유적으로 소유하셨고 담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최초의 사람이다. 그가 성령으로 세례 받아 그리스도로 임명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사에 새로운 시대를 도입하였다. 구약의 역사에 선지자들과 왕들이 성령을 받았지만 그들이 받은 것은 예수의 성령 세례와는 구분된다. 예수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아 메시야, 그리스도가 되므로 여호와의 종일 뿐 아니라 구원을 가져오고 하나님 나라를 도입한 그의 나라의 왕이 되신 것이다. 예수는 그의 부활 후 성령을 자기의 백성들에게로 파송하였다. 예수는 구속 사역과 구원의 적용 과정의 관점에서 보면 성령을 자신을 위해서 담지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담지자이시면서 동시에 성령의 파송자이시다. 예수가 성령 파송자가 된 이유는 부활로 인한 그의 구속사역의 완성 때문이다. 이 부활로 예수는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오신 성령은 근본적으로 기독론적이다. 즉 그리스도에 의해 획득되었고, 그에 의해 보내어졌고, 그의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서 오셨으며, 많은 변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에는 성령론이 기독론적으로 전개해야 하고, 또 바로 그 조망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인류에게 오실 때 그리스도에 의해 담지 되었던 영이지만 또 인성이 부착된 위격을 통해서 오셨다. 그리스도에게서 인성과 신격은 결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인성이 성령 오심이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있어서 대전기이다. 그의 인성을 통해서 성령께서 오살 수 있으므로 하나님과 인류와의 관계는 새로운 질적 관계이고, 종말에서 신인 연합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부활 후 우리에게 파송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긴밀히 연락된다. 보혜사로서 오신 성령은 원보혜사의 일을 대신함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지키고 인도하며, 가르치고 또 그들과 함께 있었다. 성령 보혜사도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깨달아 알고 생각나게 하는 일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를 증거하고 가르친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 오시는데(14:17; 15:26; 16:13), 예수가 바로 진리이다(14:6). 자기가 메시야임을 가르치고, 세상의 구속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셨다. 보혜사는 예수의 인격을 통해서 왔다. 그러므로 보혜사는 원보혜사 예수의 이름을 지닌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승계한 성령께서도 많은 은사들을 활용하시는데 그 은사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지체들에게 주시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계속되게 하신다. 즉 그의 이름의 권세와 그의 구원을 증거하여 확장되게 하고 구원이 나타나게 하신다. 이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그의 이름의 권세로 사는 일이 그리스도의 나라인데,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