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율법의 관계  

 

 

서철원 교수 / 총신대 출판부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통해서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지녔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복음의 능력은 그 자체로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재창조하는 힘을 가진다. 율법이 먼저 와서 작업을 해야 복음이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인간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는 것이다.

 

율법이 복음 전에 먼저 와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종교개혁자들의 '구원 순서적' 논리대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 전에도 구원을 위해서 역할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원 이후에도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주의 자녀들에 주어진 규범이지 의의 길이 아니다. 율법은 구원의 전() 과정도 구원의 조건도 아닌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뿐이고 선행은 믿음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도덕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규범이고 구원의 요건이 결코 되지 못한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회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서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언약 백성에게 생활 규범으로 주어진 율법을 지키게 된다. 주의 영이 그러한 힘을 주신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정신이요 완성인 '사랑'을 행할 힘을 얻게 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새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한다. 구약이나신약이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약과 신약의 통일이다. 그러므로 구약 전체의 증거이시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적 권위를 가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주요 창조주이시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시며,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주시며, 죄를 사해 주시고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주셨다. 이러한 결론 아래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율법이 구원의 조건과 관계된 것으로 인식된 이유

 

 율법은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생활 규범이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과 관계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 원인은 '기독교의 발생 배경''종교 개혁의 발생 배경'과 관련이 있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고도 율법을 잘 지켰다. 그들은 이방인들도 자기들처럼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종교 개혁 발생 배경과 관련하여, 로마 교회는 세례를 받는 믿음은 잠재적 신앙이기에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선행으로 공로를 쌓아야 한다고 보았다. 루터는 율법의 정죄를 너무 심각하게 받았기에 '오직 믿음으로'를 강조했지만, 율법이 구원의 길에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루터'의 견해 : "구원 회개 고통 율법"

 

 루터는 자기의 구원 경험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할 길로 생각하여, 믿음의 첫 단계에 개입된 율법을 통해서 절망을 경험해야 그 다음 단계인 죄 용서로 간다고 보았다. 율법과 상관없이 복음의 선포만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 선언을 받은 후에 복음을 선포받아야 하는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예비과정으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루터는, 구원을 받기 위한 전 단계인 회개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죄를 정죄하는 율법가 먼저 선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율법의 선포로 죄를 깨닫고 절망하여 겸손하게 한 후 은혜가 부어져 믿음에 이르게 되므로,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선포되기 전에 율법이 선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견해 : "회개와 믿음 그리스도의 복음"

 

 루터와 달리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성취하셔서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복음만 선포하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는다. 죄의 지적과 회개도 복음의 선포로 된다. 복음만 선포해도 처음 선포를 듣는 자가 죄인으로 정죄되어 회개에 이르게 된다. 성경공부나 수양회 등을 통해서 예수를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영접하고 회개하며 믿어 감격하는 모습에서, 이방인은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 회개하여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이 '복음만으로'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 섭리를 전개해 오셨는가의 관점, 즉 구원사(historia salutis)의 관점에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견해를 갈라디아서 기록 배경(1:6-10; 3:1-14)에서 살펴 보자. 왜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이 율법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있었을까? 포로기를 겪으면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판단하고 온 힘을 다해 율법을 지켰다. 특히 포로 귀환 후 에스라 서기관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풀어 가르치고 율법 대로 살 것을 강조한 후부터 유대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때 메시야의 도래를 앞당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창세기 126절에 근거하여,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으나 하나님의 형상 중 선행을 할 자유의지는 유지되고 있으니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유대주의 그리스인들 역시 율법을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율법을 준수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강요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에게만 있고 그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후에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다시 지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한다고 했다. 의를 완성하신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데도 불구하고 율법으로 구원을 완성하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 율법의 임무였다.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고 의의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3:19-31; 2:16-21). 바울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율법은 그 자체가 선하고 거룩해도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을 절망하게 하여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핵심이다. "구원은 믿음의 길이고 율법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의의 길을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예비하셨다(3:21).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의롭게 되는 길"이며,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인간의 공로는 완전히 배제된다(3:24-30). 율법이 가장 잘 지켜졌던 다윗 시대에도 다윗은 스스로 율법의 범함을 용서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의롭게 되는 자의 행복을 노래했다(32:1,2; 4:7-8). 다윗만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했다(3:21).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 시대에 실패한 백성들이 깨달은 것이 아니다.

 

 유대 민족의 시작이 은혜로 구원 얻는 길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하셨다. 아브라함은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었다(4:2,3). 하나님은 인간적인 조건이나 능력이 아니라 말씀하신 이를 믿는 자들은 모두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을 통해 미리 보이셨다(4:16-24).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에 대해서 모세를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4:1-25; 3:1-22). 바울은 아브라함을 단지 '믿음'의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구속사적'으로 본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대가 이어질 것을 믿고 기뻐하기 보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믿고 기뻐했다. 이삭의 씨를 통해서 세상의 구속주를 주시겠다는 섭리를 보고 기뻐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를 가르쳤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게 된다.

 

 아브라함을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430년 후에 시내산에서 율법으로 언약을 세우셨다(3:19-2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시고, 이스라엘이 율법에 기초하여 국가를 세우게 하셨다. 율법은 언약의 백성이 가져야 할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율법을 받은 백성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된다. 율법을 받은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어 절망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더 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생겨 고통한다. 율법은 백성들을 절망 상황으로 이끌어 율법의 완성자, 그리스도에게로 눈을 들게 한다. 이처럼 율법이 백성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기능을 하지만, 언약의 백성은 믿음이 온 후에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3:23-25).

 

 왜 믿음이 온 후로 율법 아래 있지 않는가? 율법은 몽학선생(노예 가정교사)이다(3:23-4:6). 갈라디아서 3:23-4:6에는 몽학선생으로 역할하는 율법에 대한 언급이 있다. 노예 중에서 학식과 덕이 있는 사람이 가정교사 역할을 했는데 그는 주인의 아들을 가르쳤고, 주인의 아들은 노예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노예와 동일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상속권을 물려주기로 작정한 날이 오면 가정 교사는 더 이상 이전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 주인이 된 아들에 대해서 가정 교사는 무력하며, 지배하는 힘을 잃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상속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의 길이 열렸고 율법의 기능은 종결 된 것이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율법으로 구원얻는 길이 끝났다. "율법으로 구원 얻는 길이 끝났다"는 말은 율법으로 구원 받는 길이 너무 어려워서 '끝나고' 예수 믿는 길이 열렸다는 말이 아니다. 처음부터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었다. 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히브리서의 가르침

 

 바울이 구원의 길이라는 측면에서 율법을 다루었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아론의 제사직의 관점에서 율법과 제사직의 효능을 다루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왜 주어졌는가? 짐승의 제사로는 사람의 죄가 속량되지 못하며 완전한 속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구약의 제사 제도가 세워졌다. 짐승의 피가 완전한 구속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반복해서 속죄 제사를 드렸고, 제사장이 완전한 구속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죽으면 계속하여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바뀌었다(7:23).

 

 율법은 아무도 온전하게 못하므로 그 율법 아래서 얻은 아론의 제사직도 온전한 속죄를 이루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로 대치되었다(7:12,18,19; 8:7-13; 9:10; 10:9).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대제사장이며 완전한 제사가 된다는 근거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개념에서 찾았다. 구약의 족보 개념에서 볼 때, 멜기세덱이 죽은 날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니 그들의 족보법에 따르면 지금도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으셨으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창조주이시면서(1:2,3: 2:10; 3:3; 4:14) 대제사장이시므로(2:10,17; 4:14)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가 된다(5:9; 7:25).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와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대해서 종과 주인,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임을 강조한다. 히브리서 1124-26절에 의하면 모세가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하고 고난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받은 것이었다. 모세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면 그리스도는 모세의 주인이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사를 종인 모세의 손을 통해 나온 율법의 제사와 비교할 수 없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5:46)

 

 십자가는 구원의 길로서, 율법과 속죄의 길인 레위 제사직이 종결되고 폐지되었다. 히브리서는 구원의 길로서 구원의 방편으로서 율법의 폐지를 말한다. 율법의 신적 권위를 폐지한다는 뜻이 아니며 언약 백성의 생활 법칙과 규범으로서 율법의 폐지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구약의 '폐지된' 제사 제도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옛 언약의 백성들은 제사 제도를 계속하므로 하나님은 이 제사 제도를 물리적 방식으로 폐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짐으로 하나님이 지성소를 드러내 보이셨다(23:44-46). 성전 제사의 종결과 폐지를 분명히 하시기 위해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셨다.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무시고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 낼 길이 없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위한 구원 섭리를 계속하시므로 옛 언약의 질서를 계속 막으셨다.

 

 

 종교개혁 신경들의 가르침

 

 초대 교회는 의식 제사법은 폐지되고 예언들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성취를 말하며 구약의 윤리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타당한 법으로 강화된 것으로 고백하였다. 초대 교회의 율법 이해가 종교개혁에 의해 계승되었다. 구원사적으로 이해한 것에는 착안하지 못하고 행위로가 아니고 믿음으로만 이라는 진리만을 강조하므로 구원에 이르는 길에는 율법의 행위로도 가능한데 더 쉬운 길인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뉘앙스를 남기게 하여 아직도 율법이 구원의 길로서 세력을 행사하고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였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 이후에는 믿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율법은 아무런 주장과 요구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인들을 얽어매지 않으나, 생활의 규칙으로 역사함을 말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 :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최초의 신앙고백서-모세의 의식들은 복음이 계시된 후에는 생략될 수 있다고 가르친 성경은 안식일을 폐지하였다. 단지 모임을 위해 한 날이 필요할 뿐이라고 하여 믿음만으로 구원얻고 율법이 구원이 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일치 공식 : 일치 공식은 구원은 은혜로서 믿음뿐이요 율법은 생할 규범으로서 신자들에게 역사한다고 가르친다. 멜랑톤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신약의 가르침대로 이해하였고 구원사적 관점에서 율법의 역할을 이해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 대로 죄의 자각도 복음의 전파로 이루어짐에는 미달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서 율법이 성취되었으므로 이방인에게 먼저 율법을 선포할 필요가 없고 복음만 선포하면 되기 때문이다.

 

1서서 신앙고백서 :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귀속된다.

 

2서서 신앙고백서 : 율법의 본래 전수 목적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임을 분명히 하고 구원의 길로서 준 법은 폐지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생활 규범으로 존재함을 밝혔다.

 

불란서 신앙고백서 : 칼빈도 율법의 기능 종결가 무위화를 가르치고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며 율법은 생활 법칙으로만 역사한다고 가르쳤다.

 

화란 신앙고백서 : 화란 신앙고백서도 율법은 다 그리스도의 그림자여서 그의 오심에서 다 성취되고 그 사용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폐기되었으나, 우리 생활의 법칙으로는 역사한다고 가르친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 우리는 율법을 도저히 연역해서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이신 그리스도만을 그의 의와 속량과 함께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교회 39개조 :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므로 의식과 예법들을 관계하는 율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 구속력이 없으나 도덕법까지 지킬 의무가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바울과 히브리서의 가르침을 잘 반영한다.

 

종교개혁 신경들을 보면, 그리스도 이후에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고 그 기능은 종결되었다. 의식법, 시민법(정치법), 윤리법 중에서 의식법은 폐지되었고 시민법은 지금 타당하지 않으며 윤리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규범으로 타당하고 강화되었다는 가르침을 따랐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구원은 율법을 통해서 아니고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 진리요, 이 구원을 위해 율법이 몽학선생으로 주어졌다는 진리에는 명확히 도달하지 못했다.

 

 

 구원사적 입장에서 주의 날을 이해 : 안식일 변경의 신학적 근거

 

 하나님은 안식일 준수를 성전처럼 물리적 방식으로 금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폐지하시고 '주의 날'을 예배드리는 날로 지키게 하셨다. 부활의 날은 처음 창조의 첫날을 능가하며 재창조의 시작이다. 구원사적 섭리에 근거해서 재창조에서는 첫 날이 하나님을 섬기는 날로 바뀌었다.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졌고 재창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부활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된 경배자들은 부활을 기념하여 예배드린다. 구속사에 기초해 보면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일 보다 위에 있어 안식에서 주일로 이동했다.

 

 

 그러므로, 율법은 생활 규범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구원의 조건도 아니며 구원을 위한 전 단계도 아니고, 언약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생활 규범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은 권위를 상실했는가? 개혁신학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역사적 권위''규범적 권위'로 구분한다. 지금 폐지되었지만 역사적으로는 권위를 가지며, 지금 이 시대에 그 '정신'은 여전히 법칙이 아니라 규범적으로 남아있다. 율법을 의식법, 시민법, 윤리법으로 구분하여 율법이 갖는 의미를 구원사적 접근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의식법 :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실현되어야 할 요구로 나타난다. 안식일을 구원의 필수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 얻은 백성으로 주일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지키는데 주일을 지키되 구약 백성들이 지킨 것보다 더 잘 지켜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십일조와 성물들도 구원의 방편으로 바치지 않고 주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구원의 도의 보존과 전파를 위해서 바친다. 율법이 구원의 길로서가 아니라 영으로 사는 백성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를 가르치고 그대로 지켜지기를 요구한다.

 

시민법 : 옛 언약의 백성들의 국가 생활을 규정하고 제재한 시민법은 현대 사회에서 그래도 다 법칙으로 통할 수 없는 면이 많으므로 그 정신에 있어서는 법칙이라기보다 규범적이라고 할 것이다. 옛 이스라엘의 시민법을 지금 상황에서 법적으로 규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의식법들의 시행을 종결시키고 폐하셨으나 본질과 정신까지도 소실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오늘날 그리스도들의 예배와 경건 생활의 규범이 되게 하셨다. 구약 백성들의 예배 참석시 성결케 하는 외적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할 때 먼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정하게 하고서 또 마음을 바로하여 예배해야 할 것임을 깨우처 주고 가르쳐 주는 기능을 한다. 주일 성수는 단지 세상 일과 오락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성수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므로 거룩하게 지킬 뿐 아니라 안식하는 날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생각하면서 편하게 쉬는 날이다. 이 안식함이 주일 성수의 규범이 된다.

 

윤리법 : 윤리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법칙이다. 구약과 신약의 윤리법은 지금도 변함없이 지켜지기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이다. 7계명을 범하면 간음자요, 8계명을 범하면 도적이고, 6계명을 범하면 살인자이고 1계명을 범하면 우상숭배자이다. 신약은 구약보다 비교 불능의 높은 윤리적 표준을 제시한다. 신약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법칙이고 법전이다. 그러나 신약은 구약과 별개의 윤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아니다. 신약과 구약은 공일한 윤리를 가르치나 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윤리가 더 과격해지고 신령해졌다. 윤리법 혹은 도덕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이후에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 더 강화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그대로 실현되기를 요구한다.

 

 이처럼 율법은 언약 백성의 '생활규범' . 율법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거룩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 때문에 심판하셨는가? 하나님이 구약의 백성들을 일시적으로 심판하실 때 그들이 율법을 범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언약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버렸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버렸다.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신약 시대에도 새 언약의 백성에게도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활의 규칙이요 규범이다. 이미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이 진리를 결정하고 분명히 했다.

 

예루살렘 사도 공회의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의 양심이 믿음으로 깨끗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15:9). 하나님이 옛 구원의 길을 폐하셨는데도 그것을 다시 도입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 도전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길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교사들도 주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증거했다. 이 사실을 결정적으로 선포한 사람은 야고보였다(15). 바리새파 장로들의 수장인 야고보는 구원은 믿음으로 얻고, 율법은 언약 백성의 생활법칙이라고 선언했다. 새 언약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생활 규범을 준수해야 함을 말했고 율법의 무거운 짐을 이방인들에게 씌워서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율법이 새언약의 백성에게 주어진 생활 규범이라면, 새언약의 백성인 우리는 어떻게 그 규범을 지킬 수 있는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영, 곧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율법을 지키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자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6:14-23). 영을 따라 사는 신령한 자들이 율법을 영의 능력으로 지키므로 율법의 요구 곧 의가 다 충족된다(8: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왜냐하면 율법을 범한 자들을 정죄하는 모든 정죄 곧 모든 죄가 그리스도 예수의 육신에게 정죄되고 심판되어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 율법을 지키어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어 그의 영광이 되게 하신다(1:6).

 

이같이 신령한 자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므로 새언약의 백성은 구약 백성들이 못한 일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언약의 백성에게 주어진 생활 규범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행동의 원리가 되는 생활 법칙이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은 사랑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으로 규정하셨기 때문에(22:36-40; 12:30,31; 10:27,28) 주를 사랑하는 자는 그의 사랑의 계명을 꼭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힘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14:9,12).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의 계명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므로,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게 된다(13:8; 5:14; 5:2; 5:8; 요일 3:23; 4:10,11; 4:21).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며 '메시야적 권위'를 가지신다.

 

 구원의 길은 율법과 상관없이 예비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구약과 신약 모두 구원의 길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메시야 예언을 기록한 부분만이 아니라 모세 오경과 역사서와 시편과 선지서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구약이 증거해 왔고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린 메시야는 예수 그리스도였다(13:16-41). 예수님도 구약이 자신을 증거한다고 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5:39)

 

구약이 이처럼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구약은 그리스도의 책이다. 예수는 구약의 그리스도이다. 신약의 그리스도는 구약의 그리스도 없이 생각할 수 없다. 구약에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시고 자기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증거와 신약의 증거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므로, 성경 해석은 반드시 양 성경의 증거를 함께 듣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이 통일되게 증거한 메시야이시며, 메시야로서의 권위를 갖고 계신다. 예수님 스스로도 공생애 사역의 첫 선포에서부터 이 땅에서 메시야로서 갖는 전권을 주장하셨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61:1-2) 이 말씀을 읽으시고 이 글이 백성들의 귀에 응했다고 하셨다(4:18-21). 예수님 자신은 구약의 어떤 왕이나 선지자보다 더 크며(12:40-42; 11:29-32), 모든 왕들과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기를 원했던 그 메시야이심을 분명히 하셨다(13:16,17; 10:23,24).

 

 메시야로서, 예수님이 가진 전권에 대해 예수님 스스로 강하게 주장하셨는데,

 

'산상수훈'을 증거하실 때, 자신의 권위가 옛 사람의 권위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옛 사람에게 말한 바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21,22,27,28,33,34,39,43,44)라는 말씀을 사용하셨다. 리델보스(Herman Riddelbos)는 예수님이 랍비의 교훈과 비교할 때 이 표현을 했다고 보지만, 예수님은 모세가 신명기에서 백성들에게 말한 계명들을 염두해 두시고,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레고'에다 '에고'를 첨가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셨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이혼법 문제로 예수를 시험하였다(10:2-9). 이때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것은 백성들의 완악함 때문에 그런 것이지 결혼의 근본법은 하나님이 정하신 몸을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혼법에 관한 문제와 산상수훈에서 예수 자신이 모세의 신적 권위보다 더 권위 있음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신약의 언약 백성이 갖는 권위는 구약의 백성이나 모세가 가진 권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안식일' 논쟁에서도 예수님의 전권 주장을 볼 수 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20:10; 5:14). 그런데 예수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는 일을 금하지 않으셨고 제자들을 변호하고 두둔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성전보다 더 크다고 선언하였다(12:6). 고의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메시야로서 전권 의식에서 나온 메시야로서의 전권 주장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시므로(12:8; 2:28; 6:5), 예수님 자신이 안식을 제정한 창조주임을 밝히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안식일 논쟁에서 안식일 법에 지배받지 않는 창조주로서의 권위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다고 선언하시면서 전권을 주장하셨다. 성전보다 더 큰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므로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성전보다 더 큰 이로서 갖는 전권을 '성전 정결' 사건에서 보여 주셨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 제사장들과 방해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압도되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예수님은, 무슨 권세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묻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자기의 권위가 사람에게서가 아니고 하늘에서 곧 하나님에게서 났음을 주장하셨다(21:23-27; 11:27-33; 20:1-8).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해 주심으로, 사죄의 권세자이심을 증거하셨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시면서(9:1-8; 2:1-12; 5:17-26), 자기가 '육체 안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다. 예수님은 자기만이 귀신과 사단을 제어할 권세를 가진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도 그 권세를 부여해 주셨다(3:15; 6:7; 10:19).

 

예수님의 권위는 누가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권위의 신임장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 위의 권위자는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서 권위를 수여받는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원래 선지자들과 율법의 교사들은 말할 때는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로 시작하고 맺거나, "율법에 기록되어 있으되"로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13:31)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을 주고 심판하는 근거였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누구도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이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시므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의를 이루고자 하는 본성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물리적으로라도 그 의도를 없애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행위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하지 말고,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의지해야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다. 자기 행위로 의를 쌓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성을 반역하는 행동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고 의지하며 주신 말씀을 따라 살 때,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실천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이는 복음적인 삶이라 할 수 없다. 구약과 신약이 모두 예수를 증거하기 때문에 성경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 성경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과 행동도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곧 복음적인 삶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직 복음'을 가르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복음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죄를 깨닫고 주의 백성이 된다. 복음이 그러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해 주시며 인생과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 되므로, '오직 예수'를 증거해야 한다. 예수 외에 인간의 의를 섞어 전한다면 믿음은 가고 의만 남게 되므로 복음이라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은혜이며 구원은 선물로 주어졌다. 복음의 힘이 너무나 놀랍고 그 은혜가 너무나 크기에 이 복음에 대한 감사와 확신을 가져야 '복음만'을 전할 수 있다. 창조주요 구속주로서 전권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은혜와 선물을 주시면서 우리를 전권 대사로 보내셨다. 새 언약의 백성은, 항상 오직 예수를 믿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자랑하고 합창하며 생활 규범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