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영감과 무오의 문제

 

서철원 교수 (총신 신대원 / 조직신학)

 

1.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지난 2, 3백년간 역사적 비평적 방법에 의해 성경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다른 인간 서적들처럼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된 책이어서 다른 역사적 저작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정된 시대에, 아직도 성경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장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지금은 모든 것이 내재화되어 우리의 세계 밖으로부터 어떤 것이 우리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선악의 결정사항도 기계에 부탁하는 세상에서 어찌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를 믿을 수 있고 초자연적으로 말을 걸어 올 수 있단 말인가? 혹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인간 자기의 목소리 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성경의 자기주장대로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고, 그 책이 가르친 대로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이고 그 계시대로 믿으며, 기독교가 존립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진리이고 기독교의 책인 성경이 말하는 것이 진리이므로 성경의 자기주장대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되 정확 무오한 진리로 받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역사적 비평적 방법은 성경을 보통 책으로 만들었는가?

 

l7세기 영국에서 형성된 이신론이 구라파 대륙으로 건너옴으로 성경의 비판 작업이 그 철학적 명분과 근거를 얻게 되었다. 이신론은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만들었다. 하나님이 세계를 지으시되 하나의 큰 기계로 만들어 거기에다가 법칙들을 집어넣음으로 그 법칙에 따라 절로 움직이게 하였다. 그러므로 더 이상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간섭하고 다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를 간섭할 필요가 없게 되면 특별 계시도 성립할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러면 정확 무오한 계시도 없어지게 되므로 성경을 일반 역사적인 책처럼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독일 경건주의 출신인 '요한 살로모 세믈러', 성경도 다른 일반 역사서와 동일한 방법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성경을 합리적인 비판적인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기록된 책이 아닌 종교 문서이면 역사적 비평적 방법으로 탐구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되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기록이 아니면 성경은 기존의 문서들을 참조해서 기록된 문서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모세의 오경이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처럼 모세의 저작이 아니고 문서들을 수집하여 이루어진 후기 저작이 되었다.

따라서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문서설이 등장하였다. 거기에는 정확무오한 기록과 영감이 아무 자리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내용이 어떤 기존의 문서들에서 왔는지를 밝히는 것이 비평적 작업의 일이 되었다.

 

신약도 동일해서 복음서들은 다 이미 있었던 전승들 을 모아서 정리한 것이고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가 전혀 아니다. 예수도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라 탁월한 종교가요 윤리 교사였다.

 

칸트 이후 독일 신학은 그 방향을 180도 회전하였다. 19세기초 신학을 시작한 슐라이어마허는 전통적인 신학을 180도 전환하여 인간의 종교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신학의 출발점과 표준점이 하나님 혹은 객관적 세계에서 인간에게로 옮겨짐으로 내재신학이 되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불가능한 것이어서 성경대로 믿는 것은 신화일 뿐이다. 그것은 순전히 내재적인 사건일 뿐이다. 그러면 이제까지의 모든 신학은 다 비신화해야 한다. 신약의 비신화는 20세기에 이르러 불트만에 의해서 시작되고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는 칸트가 시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그 귀결에 이르게 한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튀빙겐 학파를 세운 '바우어'에 의하면 복음서들은 예수의 역사적 행적과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바울의 신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성경 탐구를 문서들의 수집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것이 아니다.

 

신학에 의해서 곧 신앙에 의해서 성경이 형성된 것이면 이스라엘과 교회는 독자적으로 자기들의 신앙을 형성한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들의 영향아래 이루어졌다고 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종교 사학적 방법에 이르게 되었다.

 

종교사적 방법은 성경의 내용이 어떤 종교들에서 시작해서 어떤 중간 종교들의 단계를 거치며 성경에 어떻게 정제되어서 들어왔는지를 살피는 것을 그 임무로 하게 되었다.

 

벨하우젠은 이스라엘의 종교는 내적 진화를 거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스라엘 자체가 갖는 종교적인 사상이 역사의 진행과 함께 진화하여 선지자들의 종교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에 비해 종교사학파의 설립자인 궁켈은 이스라엘의 종교는 모두 고대 원시 종교에서부터 시작된 사상들이 여러 종교들을 경유하여 성경에 정제되어 들어 왔으니 이 모든 과정을 살피는 것이 성경 연구의 바른 방법이다.

 

궁켈의 제자 불트만은 기독교의 신학이 고대 중동에서 로마제국에로 들어온 밀의 종교와 그노시스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았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가 단지 살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적이나 말한 것이 없으면 이방 종교들과의 접촉에서 밖에 다른 사상적 출처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의 하나님으로서의 성육신,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과 승천은 현대인이 받을 수 없는 신화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신화적인 옷을 입고 숨져진 신약의 내용에 있어서 그노시스적인 인간 이해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신화적 구조를 헐고 거기서 나오는 인간 이해를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적 해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약이 말하려고 하는 인간 이해는 현대 실존철학, 특히 하이데거의 철학이다. 바울의 구속적인 개념은 밀의 종교에서 비롯되었어도 그의 인간 이해는 현대인에게 유용하다.

 

불트만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의 과격함에 대한 반동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 탐구를 시작하였다. 예수의 어법들을 볼 때 예수가 어떤 존재였고 어떤 가르침을 베풀었는지 살필 수 있다고 새 역사적 예수 탐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 자신이 메시야라든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므로 그들의 선생과 동일한 입장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독특한 표현들도 다 후기 교회의 산물에 불과한데 거기서 독특한 것을 찾아 어찌 해보겠다는 것도 아무 효험이 없다.

 

르네상스이래 지금까지 소위 학적 방법으로 성경을 파괴하여 말씀이 되지 못하게 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굳게 서고 오히려 성경이 옳은 것을 명시한다. 틀린 것은 소위 학적 방법이었고, 과학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모든 파괴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섰고 그 권위를 행사한다. 소위 학적인 합리적인 방법은 다 가설들의 연속이었고 증명이 없다.

 

 

3.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의 분리가 바른가?

 

소시니안주의는 종교개혁에 대한 합리주의적인 반동이다. 소시니안들은 성경에 영감된 요소들과 영감되지 않은 요소들로 나누는 사상의 법을 도입하였다. 이 방법이 알미니안들 특히 그로치우스와 에피스코피우스 등에 의해 취택되었는데 '르클레크'에게서 절정에 이르렀다. 르클레크의 견해가 영국에 도입되어 성경의 영감에 대해 낮은 견해를 정착되었다.

 

l7 세기 독일에서는 게오르그 칼릭스투스가 이 성경 영감에 대한 낮은 견해를 피력했는데, 18세기에 이르러 바움가르텐이 이 낮은 영감론을 영입하므로 19세기부터는 이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리하여 자연이성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들은 영감되었으나, 다른 부분들은 영감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비판적인 방법을 도입한 자들은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하여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려고 노력해 왔다.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는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질 때는 산상수훈에만 국한하게 되었다.

대개는 구원에 관계한 부분은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는데 확실한 것은 없었다.

 

20세기에 이르러 칼바르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활동주의 성경관을 제시하였다. 재래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주장에 의해 정통적인 성경관에 돌아온 것 같이 보이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정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그 의미뿐이었다.

 

성경에는 고대 중동의 신화와 전설이 많이 있고 오류도 많이 들어있지만, 성경이 계시 자체와 일치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계시 사건의 보고는 계시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 보고 혹은 기록으로 계시를 알 수 있다. 계시의 보고가 바로 역사하면 계시 자체와 일치할 수 있다. 이렇게 계시의 보고로서 성경이 계시 자체와 일치되는 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처럼 바르트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변증법적으로 분리시키고 일치시켰다. 성경이 본래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현대의 활동주의적 성경관을 도입하여 이 견해를 보편화하게 되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 오시기 때문에 인간의 말로 자기의 뜻을 알리셨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사역의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가 하나님의 성육신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절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구원이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성경이 전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자기 존재와 인격, 그의 뜻을 다 성경에 계시하였고, 그의 창조와 모든 사역을 다 계시하였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성경에 다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지 않고 일치한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4. 성경은 부분적으로 영감되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치되지 않고 분리되거나 일부분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면 성경 전체가 영감될 필요가 없다. 성경의 영감을 말하면서 어떤 부분만 영감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논리적인 모순이다 어찌 영감된 책과 영감되지 않은 책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지 수수께끼이다.

 

또 동일책에서도 어떤 부분을 영감되었고 어떤 부분은 영감되지 않는 것이 공재하는 것이 가능한가? 또 영감된 것과 역감되지 않은 부분을 나누는 구분선이 어디에 있는가?

 

통상 신앙의 신비들 곧 종교적인 진리를 담은 부분은 영감되고 과학적 역사적 사실과 시대적인 문화의 부분을 담은 부분은 영감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이 구분은 매우 임의적이고 일방적인 기준이다.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들도 다 종교적인 진리에 연관하고 그 기초가 된다.

 

성경은 전체로 영감되었고 전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에 모든 성경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게 하셨다. 영감은 영감의 성질과 범위로 구분된다. 영감은 성경저자들에게 국한하고 모든 독자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조명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영감은 성경, 특히 신약성경의 자기 증거에서 유래한다. 구약의 영감을 말하면서 디모데 후서 316절에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하였다. 여기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는 '떼오프뉴스토스'이다. '떼오프뉴스토스'"하나님의 호흡하심으로" 번역되고 이해된다. "하나님의 호흡하시므로" 는 성령으로 기록되었다 는 말씀과 같다.

 

영감은 성령이 성경저자들에게 받은 말씀을 기록하도록 하는 충동을 줌을 뜻한다. 성경은 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기록하도록 충동받아 기록하였다.

 

기록할 때에 임의로 자기들이 언어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그 내용에 맞게 성령이 단어들과 언어들을 공급함을 말한다.

 

하나님이 저자들의 가용 언어들에서 필요한 단어들과 언어들 즉, 문장들을 공급하되 바로 기록하도록 그들의 언어 선택을 지배하신 것을 말한다. 받은 계시의 내용에 적합하고 올바른 단어와 문장들로 성경이 기록되게 그들의 언어 선택을 주장하고 지배한 것을 말한다.

 

이 일은 성경의 어떤 책들에만 타당한 것이 아니고, 성경의 모든 책들에 공히 타당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전체영감이고, 완전영감이다.

 

 

5. 축자영감은 불가능한 것인가?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하고 성경을 비판적 방법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이래 성경의 축자영감이 부정되고 거부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성경의 문자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왔고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글자들이 성경을 이루므로 내용과 문자를 분리할 수가 없다. 문자가 사상을 담는 그릇이므로 그릇은 버리고 그 내용만 취할 수가 없다.

더욱이 영감이 문자의 선별과 확정을 결정하였으므로 문자는 바뀌어도 사상은 바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문자의 영감 없이 내용의 영감은 성립하지 않는다. 영감은 성령이 주어진 내용에 상응해서 단어들과 문장을 공급한 것이므로 축자영감은 당연한 귀결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며, 큰 구원 섭리로 인하여 나왔기 때문에 문자도 다 호흡되어 기록에 활용되었다. 글자가 무너지면 내용이 달라지고 변조되어 본래의 사명을 수행할 수가 전혀 없다. 사상과 언어는 같음으로 둘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계시 내용이 영감으로 유래하였으면 그 사상을 담는 그릇인 언어도 영감되었다.

 

 

6. 성경은 오류를 많이 포함하는가?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법칙이라고 고백되고 믿어져왔다. 따라서 신앙과 행위에 관한 부분은 정확하고 무오하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부분과 과학적 사실에 관한 부분들은 오류가 있고 또 많은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성경은 종교의 책이고 신앙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무오성은 그런 뜻이 아니다.

 

무오는 성경의 문장들에 오류가 없는 것이요, 성경의 기록과 그곳이 지시하는 역사적 사실들간에 아무런 오류가 없고 서로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종교적 진리들과 신앙의 신비에서만 무오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관설하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무오함을 말한다.

 

성경의 이해의 역사에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것과 과학의 결과들간에 차이나 상충이 생기면 과학은 언제든지 옳고 성경은 틀린 것으로 치부해왔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사실의 탐구여서 주관이 개입되지 않고 편견이 없이 진행되는 것으로 믿어왔다.

 

과학자들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들이요 편견과 오류가 많은 사람들이며 과학의 전제는 사람의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 시대의 신앙 혹은 기본 동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과학은 인과율에 관계하는 것만을 과학적 사실로 받으며 감각 기관에 인상을 주는 것만을 사실로 받는 자연주의를 가장 바른 원리로 삼는다.

 

과학과 역사학이 틀리고 성경이 옳다. 성경은 하나님의 최종 계시이므로 성경이 옳고 정당하며 진리이고, 과학은 진리의 파편들을 무질서하게 한 두 개씩 모은 것에 불과한데,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떠들어왔을 뿐이다. 기독교가 진리이고 성경이 진리이다.

 

성경이 현재의 지식 상태에 비추어서 부당하고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은 성경이 틀려서가 아니고, 아직 바로 탐구하지 못한 것이지 성경이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런 부분은 아직 우리의 지성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기적들 곧 동정녀 탄생과 부활과 홍해 도하 등등은 지금 과학지식과 상치되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오류인가? 기적이 불가능한 것은 기계론적인 세계관에서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자연주의에서이고 현 세계 구조에서는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 창조주는 자기의 창조법칙을 헐지 않으면서 창조세계에 간섭하여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진술들은 옛날 문서이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 아니고 가장 확실한 진리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부분이 어둡다거나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서 나온 것이고 바른 학적 탐구의 귀결로 나온 것이 아니다.